
분명 같은 향수인데 이상할 때가 있다.
겨울에 처음 맡았을 때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향수가 여름에 다시 꺼내 뿌려보니 생각보다 달고 무겁게 느껴진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름에는 상쾌하고 가벼워서 자주 사용했던 향수가 겨울이 되니 어딘가 얇고 심심하다.
향수병도 같고, 보관 상태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 몇 달 사이에 전혀 다른 향처럼 느껴진다.
향수도 계절에 따라 향이 변하는 걸까?
향수 자체가 여름용과 겨울용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향이 피부에서 공기 중으로 퍼지는 데 영향을 주는 온도, 피부 상태, 주변의 공기 흐름, 옷차림, 그리고 우리가 향을 맡는 환경이 계절마다 달라진다.
결국 같은 향수에서 어떤 부분이 얼마나 강하게 느껴지는지가 달라지는 것이다.
향수는 병 안보다 공기 속에서 느끼는 물건이다
향수를 느끼려면 그 안의 향료 성분이 피부나 옷에서 공기 중으로 이동한 뒤 코까지 도달해야 한다.
병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향을 우리가 맡는 것은 아니다.
향수병의 뚜껑을 열었을 때 향이 올라오고, 피부에 뿌린 뒤 주변으로 향이 퍼지는 것도 향을 이루는 휘발성 성분들이 공기 중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꽤 중요한 변수 중 하나가 온도다.
일반적으로 온도가 올라가면 많은 향료 성분은 공기 중으로 더 쉽게 휘발하고 확산될 수 있다.
실제 피부에 도포된 향료 성분이 공기 중으로 증발하고 확산되는 과정을 연구한 실험에서도 온도는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로 다뤄진다.
그래서 한겨울의 차가운 피부에 뿌린 향수와 한여름의 따뜻한 피부에 뿌린 향수가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퍼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향수는 같지만 향수가 놓인 환경이 달라진 것이다.
여름에는 향이 더 빨리 앞으로 나온다
더운 날 향수를 뿌리면 처음부터 향이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밝은 시트러스, 허브, 아로마틱 계열처럼 비교적 가볍게 퍼지는 향들은 처음에 확 올라오는 느낌이 강해질 수 있다.
피부 온도가 높아지고, 움직임이나 주변 공기 흐름도 향이 퍼지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겨울보다 얇은 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는 점까지 더해지면서 향수가 피부 가까이에 머물기보다 주변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는 느낌이 강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겨울에는 적당히 따뜻하고 포근하다고 느꼈던 향이 여름에는 훨씬 진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바닐라, 앰버, 달콤한 레진, 묵직한 우디 향처럼 존재감이 강한 향수라면 특히 그렇다.
향수가 갑자기 더 달아진 것은 아니다.
향이 공기 중으로 더 쉽게 퍼지면서 그 향수에 원래 있던 달콤함과 무게감까지 이전보다 또렷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추운 날에는 꽤 편안했던 향수가 더운 날에는 갑자기 답답하거나 무겁다고 느껴질 수 있다.
강하게 퍼지는 것과 오래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할 것이 있다.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과 향수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향수를 뿌렸을 때 향이 어느 정도 주변까지 퍼지는지는 흔히 발향이나 프로젝션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반면 몇 시간이 지나도 피부나 옷에 향이 남아 있는지는 지속력의 문제다.
더운 날 향이 처음부터 강하게 올라온다고 해서 반드시 더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향료의 조성에 따라 일부 성분이 비교적 빠르게 휘발하면서 초반 존재감은 강하지만, 이후 향의 변화도 빠르게 느껴질 수 있다.
향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탑노트에서 미들노트, 베이스노트로 달라지는 과정은 이전 글에서 따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침에 뿌렸을 때는 향이 크게 퍼졌는데 오후가 되자 생각보다 빨리 조용해졌다고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다.
반대로 추운 날에는 처음부터 향이 크게 퍼지지는 않지만 피부나 옷 가까이에서 한동안 잔잔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여름 향수가 “세다”, 겨울 향수가 “약하다”고 단순하게 나누기보다, 얼마나 멀리 퍼지는지와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지를 따로 보는 편이 좋다.
겨울에는 향이 상대적으로 피부 가까이에 머물 수 있다
추운 계절에는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피부 온도가 낮고 외부 공기도 차가우면 향 성분의 확산이 더운 환경만큼 활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여름에는 뿌리는 순간 밝게 튀어나오던 향수가 겨울에는 조금 얌전하게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멀리까지 향이 퍼지기보다 몸이나 옷 가까이에서 조용히 머무는 느낌이 강해질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변화 때문에 향수의 전체적인 인상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여름에는 밝고 날카로운 부분이 먼저 느껴졌던 향수도 겨울에는 따뜻한 우디, 머스크, 앰버 같은 부분이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다.
향수 속에 없던 향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니다.
같은 향수 안에 원래 함께 존재하던 여러 요소 가운데 그날의 환경에서 어떤 부분이 더 쉽게 감지되는지가 달라진 것이다.
한 장의 사진에서 밝기를 조절했을 때 없던 물체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부분이 갑자기 선명해지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
하지만 ‘겨울은 차갑다’만으로 설명하면 안 된다
계절에 따른 향수 차이를 이야기할 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실외에 있지 않는다.
겨울에는 밖이 매우 차갑지만 실내로 들어오면 난방이 강하게 켜져 있을 수 있다.
여름에는 밖이 덥고 습해도 사무실이나 자동차 안에서는 에어컨 때문에 오히려 피부가 차가워질 수 있다.
그래서 실제 향수의 느낌을 결정하는 것은 달력에 적힌 계절 이름보다 지금 내가 향수를 사용하고 있는 환경에 더 가깝다.
한여름 뉴욕 거리를 걷고 있을 때와 에어컨이 강하게 나오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 같은 향수의 느낌이 다를 수 있다.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밖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던 향이 따뜻한 실내에 들어오고 코트를 벗는 순간 갑자기 다시 올라올 때가 있다.
향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긴 것이 아니라 주변 온도와 공기 흐름이 달라진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피부도 달라진다
향수가 닿는 표면도 항상 같은 상태는 아니다.
사람의 피부 특성은 향료가 피부에서 증발하는 양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같은 향료라도 피부의 특성에 따라 증발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겨울에는 난방과 건조한 공기 때문에 피부가 평소보다 건조해지기 쉽고, 여름에는 땀과 피지, 높은 피부 온도가 함께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나는 항상 같은 피부에 같은 향수를 뿌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조건은 조금씩 달라진다.
다만 이것을 흔히 말하는 ‘사람마다 체취가 달라서 향수의 화학구조가 완전히 바뀐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향수는 피부에 닿는 순간 완전히 새로운 향수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다.
향료 각각의 휘발과 확산, 피부에 머무르는 정도가 달라지면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향의 균형이 달라진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같은 향수가 시향지와 피부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이런 차이와 연결해서 볼 수 있다.
옷이 바뀌는 것도 생각보다 큰 차이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피부와 온도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입는 옷도 완전히 달라진다.
여름에는 반팔이나 얇은 셔츠를 입고 향수를 피부에 직접 뿌리는 경우가 많다.
반면 겨울에는 니트, 셔츠, 재킷, 코트처럼 여러 겹의 옷을 입는다.
피부에 뿌린 향이 옷 안에 갇히기도 하고, 향수를 옷에 직접 뿌렸다면 피부에서 사용할 때와 다른 방식으로 오래 남기도 한다.
아침에 향수를 뿌렸는데 밖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다가 저녁에 코트를 벗으면서 다시 향이 올라오는 경험도 그래서 생길 수 있다.
공기의 흐름 또한 중요하다.
피부에 도포된 향료의 확산을 다룬 연구에서도 환기와 공기 흐름은 향이 피부에서 주변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다뤄진다.
결국 계절은 단순히 기온 하나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피부, 옷, 움직임, 바람, 실내 환경까지 한꺼번에 바꾼다.
그래서 ‘여름 향수’와 ‘겨울 향수’라는 말이 생긴다
향수 이야기를 하다 보면 흔히 여름에는 시트러스나 아쿠아틱, 겨울에는 앰버나 바닐라, 우디 계열이 좋다는 말을 듣는다.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다.
시트러스 향수를 겨울에 뿌린다고 잘못되는 것도 아니고, 한여름에 바닐라 향수를 사용한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특정 향이 어떤 환경에서 편하게 느껴지는지는 분명 달라질 수 있다.
더운 환경에서 이미 향이 활발하게 퍼지고 있는데 향수까지 매우 달고 묵직하다면 체감되는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질 수 있다.
반대로 차가운 환경에서는 밝고 가벼운 향수가 생각보다 조용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결국 계절에 맞는 향수라는 표현은 ‘이 계절에는 이 향만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이라기보다, 그 환경에서 어느 정도의 향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가에 대한 경험적인 선택에 가깝다.
향수를 바꾸기 전에 분사량부터 바꿔봐도 된다
계절이 바뀌었다고 반드시 향수 컬렉션 전체를 바꿀 필요는 없다.
겨울에 정말 좋아했던 향수가 여름에 조금 부담스러워졌다면 먼저 분사 횟수를 줄여볼 수 있다.
평소 네 번 뿌리던 향수라면 두 번만 사용해보고, 목처럼 코와 가까운 곳보다 팔처럼 조금 떨어진 부위에 사용해보는 식이다.
반대로 추운 날 향이 지나치게 조용하게 느껴진다면 무조건 더 많이 뿌리기 전에 옷을 입었을 때 향이 어떻게 올라오는지까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본인에게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주변 사람에게도 향이 약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사무실, 병원, 자동차, 식당처럼 다른 사람과 가까이 있는 공간에서는 더 그렇다.
좋은 향도 양이 지나치면 좋은 향으로 남기 어렵다.
정말 계절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같은 향수가 계절마다 얼마나 달라지는지 직접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같은 향수를 같은 횟수로 뿌리고 비슷한 위치에서 확인한다.
뿌린 직후만 보지 말고 30분 뒤, 몇 시간 뒤, 하루가 끝날 무렵의 향도 비교해본다.
그리고 단순히 ‘향이 세다, 약하다’만 기록하지 말고 조금 나누어 본다.
처음 향이 얼마나 빨리 올라오는지.
몸에서 어느 정도 거리까지 향이 느껴지는지.
중간에 향의 변화가 빠른지.
마지막에는 피부와 옷에 무엇이 남는지.
이렇게 비교하다 보면 같은 향수가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향으로 변했다기보다, 같은 향수의 서로 다른 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향수에는 계절이 없지만, 향을 맡는 환경에는 계절이 있다
향수병 안의 액체는 여름이 왔다고 스스로 가벼워지지도 않고, 겨울이 되었다고 갑자기 무거워지지도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그 향수를 둘러싼 조건이다.
피부의 온도가 달라지고, 공기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피부 상태와 옷차림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향이 공기 속으로 이동하고 우리 코에 도달하는 방식까지 바꾼다.
그래서 어떤 향수는 겨울이 되고 나서야 그 매력이 제대로 느껴지고, 어떤 향수는 여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매력이 드러나기도 한다.
몇 달 전에는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던 향을 추운 날 다시 꺼냈다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겨울 내내 좋아했던 향수를 한여름에 뿌렸다가 ‘원래 이렇게 달았나?’ 하고 놀랄 수도 있다.
향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향을 만나는 공기가 달라진 것이다.
어쩌면 계절에 따라 향수를 바꿔 쓰는 재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향수를 찾는 일만큼이나, 이미 가지고 있던 향수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향수를 즐기는 재미 중 하나다.
같은 병 안에서도 계절이 한 번 바뀌면 다시 맡아볼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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