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는 왜 시간이 지나면 향이 달라질까: 탑노트·미들노트·베이스노트 쉽게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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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를 처음 뿌렸을 때는 분명 상큼한 과일 향이 강했다.
그런데 한두 시간이 지나 다시 손목을 맡아보면 처음의 밝고 가벼운 향은 거의 사라지고,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한 향이 남아 있다.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나무 향이나 머스크를 떠올리게 하는 잔잔한 향만 피부 가까이에 머물기도 한다.

분명 같은 향수인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다른 향수처럼 느껴진다.

매장에서 처음 맡았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몇 시간 뒤 남은 향이 좋아 다시 생각나는 향수도 있고, 반대로 처음에는 강하게 끌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향수도 있다.

향수는 뿌리는 순간 완성되는 향이 아니다.
나는 향수가 한 장의 사진이라기보다는 짧은 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첫 장면이 있고, 분위기가 깊어지는 중간이 있으며,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남는 마지막 장면이 있다.

이처럼 향수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흔히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라는 말로 설명한다.

향수 속 향료는 모두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 않는다

일반적인 알코올 기반 향수는 여러 향료를 알코올에 녹이고, 필요에 따라 물과 다른 성분을 더해 만든다.

그런데 향수를 구성하는 향 성분들은 모두 같은 속도로 공기 중에 퍼지거나 피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비교적 휘발 속도가 빠른 성분은 향수를 뿌린 직후 강하게 느껴졌다가 빠르게 약해지고, 휘발 속도가 느리고 오래 머무르는 성분은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선명해진다.
향수를 뿌린 직후 알코올 냄새와 함께 밝고 날카로운 향이 먼저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후 알코올이 날아가고 빠르게 퍼지는 향들이 약해지면,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다른 향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향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성분으로 변한다기보다, 함께 있던 여러 향 가운데 어떤 향이 더 잘 느껴지는지가 계속 달라지는 것이다.
마치 여러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는 음악에서 처음에는 높은 음의 악기가 귀에 들어오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낮은 음과 리듬이 더 잘 들리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탑노트는 향수의 첫인상이다

탑노트는 향수를 뿌린 직후 가장 먼저 느껴지는 향을 말한다.
향수 매장에서 시향지를 건네받았을 때 처음 코에 들어오는 향에서는 대체로 탑노트의 인상이 두드러진다.
레몬, 베르가못, 오렌지 같은 시트러스 계열이나 가볍고 맑은 허브, 일부 과일 향이 탑노트에서 자주 느껴진다.

탑노트는 밝고 선명하기 때문에 사람의 관심을 빠르게 끈다.
그래서 향수를 처음 맡았을 때 “상쾌하다”, “달콤하다”, “조금 독하다”라고 느끼는 첫인상은 대개 탑노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첫인상이 향수의 전부는 아니다.
탑노트는 비교적 휘발이 빠르기 때문에 수 분에서 수십 분 사이에 눈에 띄게 약해질 수 있다.
향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매장에서 몇 초 동안 맡아본 향만으로 향수를 판단하면 실제로 오래 함께하게 될 향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구매할 수도 있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향수도 첫 향만으로는 전체 모습을 알기 어렵다.

미들노트에서 향수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탑노트가 조금씩 가라앉으면 향수의 중심을 이루는 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미들노트 또는 하트노트라고 부른다.
장미, 재스민, 라벤더와 같은 플로럴 향이나 향신료, 녹색 식물, 차, 허브처럼 향수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이 구간에서 잘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향수를 뿌린 직후에는 상큼하고 가벼웠는데 30분 정도 지나면서 꽃 향이 부드럽게 올라오거나,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던 스파이시한 향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도 미들노트가 드러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많은 향수에서 미들노트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가볍고 휘발이 빠른 첫 향과 오래 남는 무거운 향 사이를 연결하면서, 이 향수가 깨끗하고 맑은 향인지, 따뜻하고 관능적인 향인지, 차분하고 서늘한 향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향수를 고를 때는 뿌린 직후보다 적어도 20분에서 30분 정도 지난 뒤의 향을 다시 맡아보는 것이 좋다.
이때부터 첫 향에 가려져 있던 향수의 성격이 조금 더 분명해진다.

베이스노트는 하루의 끝에 남는 향이다

향수를 뿌리고 몇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밝은 향들은 대부분 약해진다.
그 뒤 피부나 옷에 오래 남는 향의 층을 베이스노트라고 부른다.
베이스노트에서는 샌들우드나 시더우드 같은 우디 계열을 비롯해 머스크, 바닐라, 앰버, 레진처럼 비교적 무겁고 지속력이 긴 향의 인상이 자주 느껴진다.

베이스노트는 대체로 탑노트처럼 즉각적으로 강하게 느껴지기보다, 피부 가까이에서 오래 머물며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손목을 코 가까이 가져갔을 때 부드럽게 느껴지거나, 하루가 끝난 뒤 옷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향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향수를 뿌린 뒤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는 후반부의 향 전개를 흔히 드라이다운이라고 부른다.
나는 드라이다운이 향수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향수를 뿌린 뒤 비교적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되는 향이기 때문이다.

처음 10분 동안만 매력적인 향수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해지고 자꾸 다시 맡고 싶어지는 향수에 손이 더 자주 간다.

처음에는 조금 평범하게 느껴졌지만 몇 시간 뒤 피부에 남은 향이 좋아 결국 구입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첫 향은 화려하고 인상적이었지만, 마지막에 지나치게 달거나 무겁게 남아 포기하기도 한다.

향수의 진짜 인상은 어쩌면 첫 향이 아니라 마지막에 남은 향에서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탑노트와 베이스노트가 정확히 나뉘는 것은 아니다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라는 설명은 향수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실제 향이 정확히 세 단계로 분리되어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탑노트가 끝난 뒤 미들노트가 시작되고, 미들노트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 베이스노트가 나타나는 식으로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여러 향은 처음부터 함께 존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겹치거나 강약이 달라진다.

어떤 향수는 탑노트에서 베이스노트까지 변화가 매우 크다.
처음에는 시트러스 향이 강했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우디 머스크 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반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큰 변화 없이 비슷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향수도 있다.
이런 향수는 흔히 리니어한 향수라고 표현한다.

또한 향의 전개 속도와 인상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피부 온도가 높으면 향이 조금 더 빠르고 강하게 퍼질 수 있고, 피부가 건조하면 향이 피부에 오래 머물지 못해 비교적 빨리 사라진다고 느낄 수 있다.
날씨와 습도, 뿌린 양, 뿌린 위치, 옷에 뿌렸는지 피부에 뿌렸는지에 따라서도 향의 전개가 달라진다.

같은 향수가 시향지와 피부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시향지에서는 좋았는데 피부에서는 달랐던 향수‘에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했다.

향수 노트에 적힌 재료가 모두 실제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향수 설명을 보면 레몬, 장미, 가죽, 담배, 바닷바람, 젖은 흙처럼 다양한 노트가 적혀 있다.
이 목록을 보면 향수 안에 레몬이나 장미, 가죽 같은 재료가 실제로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향수에서 말하는 노트는 반드시 원재료 목록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러 향료를 조합해 특정한 냄새의 인상을 만들기도 한다.
실제 가죽을 넣지 않아도 여러 향 성분을 섞어 가죽을 떠올리게 하는 향을 만들 수 있고, 바닷물을 넣지 않아도 짭짤하고 시원한 공기를 연상시키는 향을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향료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통합된 향이나 특정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어코드라고 부른다.
커피에서 초콜릿, 견과류, 베리 같은 향이 느껴진다고 해서 실제로 그 재료가 커피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향수에 제시된 노트 목록은 향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와 같다.
실제 성분을 정확히 나열한 목록이라기보다, 향수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려 하는지 미리 보여주는 안내에 가깝다.

향수는 매장에서 바로 결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

향수를 테스트할 때는 첫 향만 맡고 바로 구매를 결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선 시향지에서 향의 전체적인 방향을 확인한 뒤, 마음에 드는 향수 한두 개만 피부에 직접 뿌려본다.
여러 향수를 한꺼번에 피부에 뿌리면 향이 섞이거나 코가 쉽게 피로해져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피부에 뿌린 후에는 시간을 두고 몇 번 다시 맡아본다.
처음 뿌린 직후에는 첫인상을 확인하고, 약 20분에서 30분 뒤에는 향수의 중심적인 분위기를 살펴본다.
두세 시간이 지난 뒤에는 피부에 어떤 향이 남는지 확인한다.
가능하다면 하루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옷이나 피부에 남은 마지막 향도 맡아보는 것이 좋다.

향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확인하려면 향수를 뿌린 손목을 서로 문지르지 않는 편이 낫다.
손목을 문지른다고 향 자체가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마찰로 향수가 피부 위에 퍼지고 마르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향수를 자연스럽게 마르게 두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살펴보는 편이 향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향수를 테스트하는 날의 날씨와 장소도 기억해두면 좋다.
에어컨이 작동하는 서늘한 매장 안에서 맡았던 향이 덥고 습한 여름 바깥에서는 훨씬 강하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달콤한 향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향수는 병 속의 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피부와 체온, 날씨와 공간, 그리고 향을 맡는 사람의 기억이 함께 만나야 비로소 하나의 향이 된다.

좋은 향수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맡고 싶어진다

향수의 첫 향은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
하지만 그 향수를 실제로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 지난 뒤의 향일 때가 많다.
처음에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피부에 조용히 남은 향이 하루 종일 마음에 들기도 하고, 어느 날 옷깃에서 다시 느껴진 잔향이 그 향수를 특별하게 만들기도 한다.

향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향은 특정한 계절과 연결되고, 어떤 향은 한때 자주 머물렀던 장소나 함께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향과 기억이 강하게 연결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향은 왜 기억을 건드릴까‘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향수를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가장 강하고 화려한 첫 향을 선택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내 피부에서 편안하게 남아 있는 향, 무심코 다시 손목을 맡아보게 하는 향, 하루가 끝난 뒤에도 조금 더 머물러주었으면 하는 향을 찾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향수는 한 번 맡아보고 고르기보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오래 함께했을 때 더 좋아지는 향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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