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어느 날 새벽 세 시, 전화가 울렸다.
이식팀에서 걸려온 전화였고,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옷을 챙겨 입고 아무도 없는 도로를 달렸다.
신호등마저 혼자 깜빡이는 길 위에서, 나는 세상에 홀로 깨어 있는 사람 같았다.
문을 열면 병리검사실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낮이면 옆 실험실 동료들 소리로 북적였을 복도가, 24시간 돌아가는 랩이라 어딘가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유난히 비어 보인다.
형광등 아래 조직 하나만 마주하고 있으면, 세상의 소음이 전부 저 문 너머에 남겨진 것 같다.
방금 적출된 조직을 OCT 컴파운드에 파묻어 급속 냉동시키고 얇게 절편을 내어 슬라이드에 올린다.
스캐너에 넣으면 화면 가득 조직이 펼쳐지고, 마우스로 확대·이동하며 이식 가능 여부를 몇 분 안에 판단해야 한다.
손끝은 침착한 척하지만, 수술실에서 내 결과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심장 어딘가를 계속 두드린다.
모니터 위로 확대된 조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조직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남은 평생을 되찾아 줄 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작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 화면 위에 조직이 올라오는 일 자체가 얼마나 드문 일인지도 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하루 평균 열두 명이 이식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나고 있고, 전국 대기자 명단에는 십만 명이 넘는 이름이 올라 있다.
7분마다 한 명씩 그 명단에 새 이름이 더해진다는 통계를 볼 때마다, 지난해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이식이 4만 9천여 건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절박한 숫자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행히 그 사망자 수는 몇 년 전보다는 줄어드는 추세라지만, 줄어드는 속도보다 명단이 길어지는 속도가 여전히 더 빠르게 느껴지는 밤들이 있다.
나는 수술장에도, 중환자실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대기자 명단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도, 그 반대로 새 삶을 얻는 순간의 얼굴도 직접 보지 못한다.
내가 보는 건 오직 모니터 위에 펼쳐진 세포들뿐이고, 그 세포들이 이식 가능하다는 판독을 내리는 그 몇 분이 내가 그 사람들과 마주하는 유일한 접점이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내 손끝에서 결정되는 이 짧은 순간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스스로도 자주 잊는다.
그날 새벽, 화면을 넘기며 판독 소견을 적어 내려가다가, 문득 이 조직을 기증한 사람과 그 가족을 떠올리며 손이 잠시 멈췄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대단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정확해야 할 사람이 나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대기자 명단이 길어지는 것도, 하루 열두 명의 죽음도 나 혼자 바꿀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날 새벽 이 화면 하나만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봐야 한다는 것.
그게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유일하게 분명한 일이다.
써전과 논쟁 아닌 논쟁을 한 이후 정리를 하고 센터를 나서는 길, 뉴저지의 하늘이 아직 어두웠다.
나는 문득 그날 밤 내가 들여다본 조직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새벽보다 먼저 찾아온 두 번째 삶이라는 걸 떠올렸다.
아무도 모르게 지워지는 이름들 옆에는, 아무도 모르게 이어지는 이름들도 있다는 것. 모니터 불빛을 끄며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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