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셰리 위스키를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Macallan을 떠올린다.
한편 누군가는 Macallan과 GlenDronach을 셰리 위스키의 양대 산맥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GlenDronach을 Macallan의 가성비 좋은 대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GlenDronach은 무언가를 대신하는 위스키가 아니다.
누가 “셰리 위스키 하면 어떤 증류소가 먼저 생각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GlenDronach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GlenDronach의 여러 위스키 가운데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병이 있다.
사진 속 The GlenDronach 15 Year Old Revival이다.
‘꾸덕함’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만든 위스키
언젠가부터 위스키를 설명하면서 ‘꾸덕하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테이스팅 용어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도대체 액체가 어떻게 꾸덕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GlenDronach을 마실 때면 이상하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잘 익은 생과일의 산뜻한 달콤함보다는 오랫동안 말려 수분이 빠진 과일의 짙은 단향.
건포도와 말린 자두, 대추처럼 농축된 과일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눅눅함과 꿉꿉함.
오래된 나무 서랍을 열었을 때 올라오는 나무 냄새와 그 안에 넣어둔 말린 과일의 향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느낌.
분명 꿉꿉한데 기분 나쁘지 않고, 무거운데 답답하지 않다.
향이 입안과 코 안쪽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위스키를 마시며 ‘꾸덕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데에는 GlenDronach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한 증류소의 위스키를 20종 가까이 마셨다는 것
돌이켜보면 GlenDronach은 내가 가장 다양한 제품을 마셔본 증류소이기도 하다.
10년, 12년, 15년, 16년, 18년과 21년.
Port Wood, Cask Strength Batch 8·10, Master Vintage 1993.
Single Cask 1993 PX 27년, 1994 Oloroso 26년, 1994 Port Pipe 25년, Oloroso Sherry Cask 33년.
Grandeur Batch 8·10·11, Kingsman Edition 1989, 그리고 Octaves까지.
이름을 하나씩 적어보니 거의 20종에 이른다.
숙성 기간도 달랐고 사용된 캐스크도 달랐다.
어떤 병은 PX의 농밀한 과일 향이 두드러졌고, 어떤 병은 Oloroso 특유의 드라이함과 나무 향이 중심에 있었다.
Port Pipe에서 숙성된 병은 또 전혀 다른 붉은 과일의 인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 번도 “이전에 마셨던 것과 똑같다”거나 “비슷한 병을 다시 마시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각자의 표정은 분명히 달랐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말린 과일, 오래된 나무, 어두운 인상의 향신료와 묵직한 셰리 캐스크의 흔적.
병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에는 GlenDronach이라는 한 곳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내가 이 증류소를 오랫동안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사라졌다 돌아온 GlenDronach 15 Revival
GlenDronach 15 Revival은 15년간 숙성된 하이랜드 싱글몰트 위스키다.
사진 속 병의 라벨과 현재 공식 제품 설명에는 모두 Pedro Ximénez와 Oloroso 셰리 캐스크 숙성이 명시되어 있으며, 사진 속 병의 알코올 도수는 46%다.
Revival은 2009년 GlenDronach 15년 제품이 다시 출시되면서 붙은 이름으로, 이 제품이 걸어온 이력과도 잘 어울린다.
이후 숙성 원액 재고 부족으로 2015년 생산이 중단됐지만, 약 3년 뒤인 2018년 다시 시장에 돌아왔다.
2018년에 재출시된 제품은 Oloroso와 PX 셰리 캐스크를 함께 사용했으며, 알코올 도수 46%로 병입됐다.
하지만 이런 제품 이력이나 사양을 모르고 마셔도 이 병의 성격은 비교적 명확하게 느껴진다.
가볍고 산뜻하게 지나가는 셰리 위스키라기보다, 잔 안에서 천천히 몸집을 키우며 말린 과일과 나무의 향을 겹겹이 펼쳐 보이는 위스키다.
말린 과일의 꿉꿉함과 눅진함
잔에 따르고 잠시 기다리면 앞서 말한 ‘꾸덕함’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생포도나 갓 익은 체리처럼 밝고 싱그러운 과일보다는, 건포도와 말린 자두처럼 수분이 빠지며 단향이 안쪽으로 농축된 과일에 가깝다.
GlenDronach 15년에서는 그 농축된 과일 향 위로 묵은 나무와 어두운 향신료의 인상이 겹쳐지며 전체의 분위기를 한층 어둡고 눅진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혀에서 느껴지는 단맛이 무작정 강한 것은 아니다.
코에서는 충분히 달콤하지만 입안에서는 나무와 드라이한 셰리의 느낌이 단맛을 눌러준다.
나는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단향은 좋아하지만, 혀에 직접적으로 남는 단맛에는 그만큼 큰 매력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그런 내 취향에는 달콤함만 강조된 위스키보다, 말린 과일의 단향 뒤에 나무와 약간의 쌉쌀함이 따라오는 위스키가 더 잘 맞는다.
혼자만 오크통에 담겨 있었던 것 같은 향
GlenDronach 15년을 다른 코어 레인지와 비교했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오크였다.
물론 12년, 18년, 21년을 비롯한 다른 제품들 역시 모두 오크 캐스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15년을 마시면 이상하게 이 녀석만 혼자 오크통에 담겨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잔에 코를 가까이 가져가면 말린 과일과 셰리의 단향 사이로 오래된 나무 냄새가 유난히 강하게 올라온다.
새 오크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톱밥 냄새나 선명한 바닐라 향보다는, 오랜 시간 원액을 머금어온 캐스크의 안쪽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다.
입안에서도 그 나무의 존재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과일의 농밀함이 먼저 입안을 채운 뒤, 오크의 쌉쌀함과 드라이함이 혀 가장자리를 잡는다.
삼킨 뒤에는 말린 과일의 단향과 함께 나무껍질처럼 건조한 느낌이 남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오크가 다소 강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바로 그 과한 듯한 오크가 GlenDronach 15년의 가장 선명한 개성이었다.
셰리의 단향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끝까지 달콤함에만 머무르지 않게 만드는 중심축.
이 병을 다른 GlenDronach 코어 레인지와 구분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 그 나무의 존재감이었다.
PX와 Oloroso,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오래된 병들
현재 GlenDronach 15년을 구성하는 두 축은 Pedro Ximénez와 Oloroso 셰리 캐스크다.
PX는 농밀한 건포도와 시럽 같은 단향을 더하고, Oloroso는 상대적으로 드라이한 견과류와 나무의 인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흔히 설명된다.
두 캐스크가 함께 사용된 GlenDronach 15년은 짙은 과일의 단향과 오크의 드라이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 취향만 놓고 보면 PX와 Oloroso가 함께 사용된 요즘 병들보다 Oloroso의 성격에 조금 더 집중한 오래된 병들이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PX의 농밀함이 강조된 병보다는 Oloroso의 건조한 과일, 견과류, 오래된 나무와 약간의 쌉쌀함이 중심에 있는 병을 마실 때 더 오래 잔을 들여다보게 된다.
문제는 그런 오래된 병들이 이제는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취향을 알아갈수록 내가 좋아하는 병은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진다는 것.
위스키를 오래 마신 사람이라면 아마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함정이다.
Macallan의 가성비 버전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GlenDronach을 두고 Macallan의 가성비 버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셰리 캐스크 위스키로 널리 알려져 있고, 가격 차이까지 생각하면 왜 그런 비교가 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증류소의 여러 제품을 마셔본 내게는 GlenDronach을 단순히 저렴한 Macallan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증류소만의 성격을 너무 많이 지워버리는 표현처럼 느껴졌다.
GlenDronach에는 GlenDronach만의 방향이 있다.
잘 정돈되고 매끈한 셰리의 단맛보다는 조금 더 거칠고, 어둡고, 오래된 창고 같은 분위기.
예쁘게 다듬어진 과일보다 오랫동안 말려 표면이 주름진 과일.
깨끗한 새 가구보다 오랜 세월 사람의 손과 액체의 흔적을 품은 나무.
이 증류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진한 셰리 위스키를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마실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 특유의 꿉꿉함과 눅진함, 오크와 말린 과일이 겹쳐지는 방식이 다른 증류소에서는 완전히 똑같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Billy Walker여도, Rachel Barrie여도
GlenDronach의 최근 역사를 이야기할 때 Billy Walker와 Rachel Barrie의 이름을 빼놓기 어렵다.
Billy Walker가 이끌던 The BenRiach Distillery Company는 2016년 The GlenDronach, BenRiach, Glenglassaugh를 Brown-Forman에 매각했다.
Rachel Barrie는 이듬해인 2017년 세 증류소의 위스키 메이커로 합류했으며, 현재 The GlenDronach은 그녀를 마스터 블렌더로 소개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제품이 보여주는 인상도 조금씩 달라졌고, 내가 오래전 병과 요즘 병을 비교해봤을 때도 그 차이는 분명했다.
Billy Walker 시대의 병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Rachel Barrie가 선보인 새로운 제품들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순수 Oloroso든 Oloroso와 PX의 조합이든, 오래된 싱글 캐스크든 현재의 코어 레인지든 나 역시 각각의 병에 대한 선호는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늘 같은 결론으로 돌아온다.
Billy Walker가 됐건, Rachel Barrie가 됐건.
순수 Oloroso이건, Oloroso와 PX의 조합이건.
그냥 GlenDronach은 사랑이다.
나에게 GlenDronach 15년이 남긴 것
내가 마셔본 GlenDronach 가운데 가장 희귀하거나 가장 오래 숙성된 병은 15년이 아니다.
더 오래 숙성된 병도 있었고, 훨씬 적은 수량만 병입된 싱글 캐스크와 Grandeur도 있었다.
그럼에도 GlenDronach 15년은 이 증류소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병 중 하나다.
말린 과일의 기분 나쁘지 않은 꿉꿉함.
입안에 달라붙는 듯한 눅진한 셰리의 향.
그리고 다른 코어 레인지보다 유난히 강하게 느껴졌던 오래된 오크통의 냄새.
내가 GlenDronach에서 좋아했던 요소들이 이 병 안에 선명하게 모여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Macallan과 비교되는 셰리 위스키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진한 셰리 위스키에 입문하기 위한 한 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GlenDronach 15년은 조금 다른 의미로 남아 있다.
한 증류소의 위스키를 20종 가까이 찾아 마시게 만들었고, ‘꾸덕함’이라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Oloroso와 PX 사이에서 내가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지 알게 해준 병.
사진 속 병은 이제 완전히 비어 있다.
하지만 이 병을 바라보면 GlenDronach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순간과, 이후 수많은 병을 하나씩 찾아 마셨던 시간이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한다.
나에게 ‘셰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증류소는 GlenDronac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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