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인 줄 몰랐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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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막 순간이라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이라면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말을 건네고,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제대로 작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살아보니 대부분의 마지막은 그렇게 찾아오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문을 닫고,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한 길을 돌아서고, “다음에 보자”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남긴 채 헤어진다.

그러고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다.

아,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어릴 때 살던 집에서 보낸 마지막 밤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그날도 잠을 잤을 것이고, 다음 날 아침에는 익숙한 방문을 열고 나왔을 것이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것이고, 어쩌면 평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마지막으로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평범한 하루였을 테니까.

‘마지막’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나중에 붙었다.

학교도 그랬다.
매일 지겨울 만큼 반복되던 등굣길이 어느 날 끝났지만, 그 마지막 아침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기억은 없다.
매일 만나던 친구들과도 졸업 후에는 당연히 계속 만날 것 같았다.

“연락하자.”
“또 보자.”

너무 흔한 말이라 별 의미도 두지 않고 헤어졌는데, 그중 어떤 사람과는 정말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마지막 대화가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오래 이야기를 했을까?
조금 더 잘 웃어주었을까?
조금 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모든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해서 삶이 더 행복했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버거운 일일 것이다.
아침마다 가족의 얼굴을 마지막인 듯 오래 바라보고, 좋아하는 장소를 떠날 때마다 다시는 오지 못할 것처럼 뒤돌아보고, 누군가와 헤어질 때마다 이 대화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하루가 이어질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내일도 출근할 것이고, 다음 주에도 같은 가게에 갈 것이고, 다음 달에도 같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믿음 덕분에 우리는 평범한 하루를 평범하게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마지막을 마지막처럼 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의외로 거창한 순간들이 아니다.
아주 비싼 식사를 했던 날보다 어느 늦은 저녁 함께 먹었던 평범한 밥 한 끼가 생각날 때가 있고, 멀리 떠났던 여행보다 매일 지나던 동네 골목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어떤 계절의 냄새를 맡다가 오래전에 살던 집이 떠오르기도 하고, 우연히 들은 노래 한 곡 때문에 한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또렷해진다.

부엌에서 들려오던 그릇 부딪히는 소리.
여름 저녁 창문으로 들어오던 바람.
집 앞에 세워두었던 오래된 차.
누군가가 습관처럼 하던 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다.

그래서 사진도 남기지 않았고, 기억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기억은 중요한 순서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붙잡고 싶은 것을 제멋대로 남겨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무언가가 끝난 순간보다, 그것이 끝났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훨씬 뒤늦게 찾아올 때가 많다.
매일 하던 일을 어느 순간 하지 않게 되고, 늘 연락하던 사람과 연락하는 간격이 조금씩 길어지고, 자주 찾던 장소에 몇 달 동안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그제야 생각한다.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확한 날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끝났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끝나는 장면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훨씬 더 많은지도 모른다.
뚜렷한 작별도 없고, 마지막 인사도 없이 조용히 지나가 버리는 것들.

예전에는 무언가를 오래 기억하려면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가거나,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거나, 기념할 만한 사건이 있어야 기억에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 그리워지는 것은 꼭 특별한 날만은 아니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된다.
오히려 당시에는 너무 평범해서 아무 의미도 붙이지 않았던 하루가 훗날 가장 그리운 날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 모두 자기 자리에 있던 저녁.
아무 걱정 없이 친구와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밤.
익숙한 출근길에서 별생각 없이 커피를 마시던 아침.

그때는 그런 날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히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매 순간 감사하고, 매 순간 행복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때로는 하루가 지겹고, 누군가의 말이 귀찮고, 빨리 집에 가고 싶기도 하다.
그것도 결국 살아가는 모습이다.

다만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들 중에도, 언젠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 날이 있을지 모른다고.

오늘 앉아 있는 이 자리도,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은 대화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장면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다고 매 순간을 붙잡고 살 수는 없다.
시간은 그렇게 붙잡는다고 멈추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냥 조금 천천히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하루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좋다.
사진을 남기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아주 가끔은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간 시간이 된다는 사실 정도만 떠올려 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먼 훗날 오늘을 떠올리면서, 그때는 몰랐지만 참 괜찮은 날들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도,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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