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속 병은 이미 비어 있다.
하지만 이 병을 처음 열었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꽤 선명하다.
처음 이 녀석을 만났던 날.
그날이 내 피트 위스키의 첫 경험이었다.
잔을 코 가까이 가져가자 평소 마시던 위스키에서는 맡아본 적 없던 매캐한 연기 냄새가 올라왔다.
달콤한 과일이나 나무 향을 찾아보기도 전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 듯한 향이 먼저 코를 붙잡았다.
첫 반응은 솔직히 단순했다.
‘이걸 어떻게 마시지?’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웃긴 반응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분명 처음 경험하는 향인데도 어딘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처음 맡아보는 피트가 익숙했던 이유
한참 뒤에야 그 익숙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나이트나 클럽을 다니던 때, 양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증류소에서 만들었는지, 싱글몰트와 블렌디드 위스키가 어떻게 다른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 안에서 비교적 만만하게 주문할 수 있다는 이유로 조니워커 블랙을 꽤 많이 마셨다.
마실 때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을린 나무와 연기 같은 향을 당시에는 그냥 ‘양주 냄새’라고 생각했다.
위스키에 들어가는 원액마다 서로 다른 성격이 있고, 그 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나중에서야 Talisker가 Johnnie Walker Black Label의 키 몰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확한 블렌딩 비율은 공개되지 않지만, Talisker의 해풍을 머금은 스모키함이 Black Label의 스모키한 인상을 만드는 데 한몫한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첫 잔에서 느꼈던 묘한 익숙함이 조금은 설명되는 듯했다.
Talisker 10년은 내가 이름을 알고 마신 첫 피트 위스키였지만, 그 연기의 흔적은 훨씬 전부터 내 기억 속을 몇 번이나 지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이걸 어떻게 마시지?’에서 시작된 변화
첫 잔에서는 그저 자욱한 연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위스키 안에 연기가 통째로 들어 있는 것 같았고, 그 향이 다른 맛을 모두 가려버리는 듯했다.
한 모금 삼키고 나면 입안과 목 뒤에 남는 후추 같은 자극도 낯설었다.
그런데 몇 번 더 마시면서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스모키함 안에도 여러 가지 결이 있었다.
장작불이 꺼진 뒤 남은 재 냄새도 있었고, 젖은 돌에 부딪힌 바닷물이 튀는 듯한 짠 기운도 있었다.
그 사이로 보리의 고소함과 달큰함이 올라왔고, 마지막에는 목 뒤를 데우는 후추가 남았다.
당시에는 피트가 맛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피트는 위스키 위를 덮고 있는 연기막이 아니라, 단맛과 짠맛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난 뒤부터 Talisker 10년의 맛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연기 뒤에 숨어 있던 맛을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도 생겼다.
병원 냄새보다는 바다 냄새에 가까운 피트
피트 위스키를 설명할 때 흔히 소독약이나 요오드 냄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내게 그 표현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소독약 냄새라고 하면 막연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병원 복도와 처치실에서 맡았던 향이 바로 떠오른다.
하지만 Talisker 10년에서 내가 느낀 피트는 그쪽과 조금 달랐다.
요오드나 약품이 코를 찌르는 느낌보다는 바다의 짠내에 가까웠다.
생굴을 꺼냈을 때 함께 올라오는 차갑고 짭조름한 향, 파도가 빠져나간 뒤 젖은 바위에서 느껴지는 냄새, 해초와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 같은 인상이었다.
Talisker의 공식 테이스팅 노트에서는 피트 스모크와 함께 생굴을 연상시키는 바다의 염분감과 시트러스의 단맛을 향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맛에서는 건과일의 단맛과 보리의 고소함, 연기와 후추가 차례로 이어지며, 마무리에는 따뜻하고 매콤한 후추의 인상이 남는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Talisker 10년은 피트 위스키이면서도 불과 연기만 떠오르게 하는 술은 아니었다.
연기보다 바다가 먼저 떠오르는 피트.
부산 바닷가에서 자란 내게 그 인상은 어딘가 친숙했고, 이 녀석을 계속 마셔보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Ardbeg과 Octomore를 지나 다시 바라본 Talisker
그 뒤로 피트 위스키를 하나씩 더 마셔봤다.
Ardbeg에서는 강한 숯과 약품 같은 향을 느꼈고, Octomore처럼 잔을 따르는 순간부터 압도적인 피트향을 뿜어내는 위스키도 접했다.
그런 녀석들을 거치고 다시 Talisker 10년으로 돌아오면 첫 잔에서 받았던 충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예전에는 잔을 가까이 가져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 정도면 아주 순한 양이지’ 싶다.
Talisker 10년의 피트가 실제로 약해진 것이라기보다는 내 기준이 변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연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경험이 쌓인 뒤에는 그 안에서 바닷물의 짠 기운과 후추, 몰트와 과일의 단맛을 따로 구분할 수 있게 됐다.
강한 피트에 익숙해진 지금 마시면 Talisker 10년은 거친 불길보다는 해안가에서 피운 작은 모닥불처럼 느껴진다.
연기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숨을 막지는 않는다.
불 가까이에 서 있으면서도 그 너머의 바다 냄새를 함께 맡을 수 있다.
피트와 단맛, 그리고 짠맛의 조합
처음 Talisker 10년의 느낌을 메모했을 때 나는 피트와 버번과 셰리의 조합이라 표현했다.
물론 실제 캐스크 구성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내게 익숙했던 버번과 셰리 위스키의 풍미가 피트와 함께 겹쳐졌다는 의미였다.
피트 아래에는 버번에서 익숙하게 느꼈던 바닐라와 곡물의 달큰함이 있었다.
그 위로는 셰리 위스키에서 종종 느꼈던 건포도나 말린 과일 같은 단향이 지나갔다.
여기에 희미한 시트러스가 끼어들면서 맛이 지나치게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막아주었다.
첫맛은 달았고, 곧이어 짭조름한 바다 향과 연기가 밀려왔으며, 삼킨 뒤에는 후추의 열감이 혀와 목 뒤를 훑었다.
달고, 짜고, 다시 달다가 매콤하게 끝나는 흐름.
흔히 말하는 ‘단짠단짠’이라는 표현이 위스키에도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술을 통해 알게 됐다.
그렇다고 사탕처럼 노골적으로 단 것도 아니고, 소금물처럼 짠 것도 아니다.
건과일의 단향과 바닷바람의 염분이 서로 밀고 당기는 사이에서 피트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여기에 후추가 마지막 선을 그으면서 한 모금의 흐름을 또렷하게 마무리한다.
Talisker 특유의 후추 맛은 단순히 맵다는 느낌과도 조금 다르다.
목 뒤쪽이 천천히 따뜻해지고, 잔을 내려놓은 뒤에도 혀 가장자리와 목 안쪽에 온기가 남는다.
도수는 45.8%지만 숫자보다 더 힘 있게 느껴지는 순간도 바로 이 후추 때문인 듯하다.
피트 위스키의 첫 기준점
지금 누군가 내게 가장 강렬한 피트 위스키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Talisker 10년을 고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 짙은 스모키함과 훨씬 강한 피트의 존재감을 가진 위스키가 많다.
약품 향이 선명한 위스키도 있고, 숯과 재가 입안을 가득 메우는 위스키도 있다.
그럼에도 내 피트 취향을 이야기할 때 Talisker 10년은 빼놓기 어렵다.
가장 강해서가 아니다.
가장 먼저였고, 그 첫인상이 오랫동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피트는 이해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Talisker 10년을 몇 잔 마시고 나서야 연기 안에도 단맛과 바다의 짠 기운이 있고, 과일과 후추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마시지?’라고 생각했던 술이 나중에는 Ardbeg과 Octomore, Laphroaig, Lagavulin, Bowmore 같은 녀석들을 찾아 마시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다.
사진 속 병에는 이제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빈 병을 보면 첫 잔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과 어느 순간부터 그 연기가 좋아지기 시작했던 과정이 함께 떠오른다.
Talisker 10년은 내가 마셔본 최고의 피트 위스키라고 말할 수 있는 술은 아니다.
대신 내가 피트 위스키를 좋아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술이다.
바다의 짠내와 굴을 떠올리게 하는 향, 건과일의 단맛, 희미한 시트러스, 그리고 목 뒤에 남는 따뜻한 후추.
한때는 낯설어서 망설였던 그 조합이 이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맛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완전히 낯선 맛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니워커 블랙의 스모키함 속에서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지만 그 이름을 몰랐을 뿐.
빈 병이 된 Talisker 10년은 지금도 내게 피트 위스키의 기준이라기보다, 그 세계로 들어가는 첫 문을 열어준 술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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