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술은 첫 모금보다 병이 먼저 기억에 남는다.
Noah’s Mill이 그랬다.
요즘 리쿼샵의 버번 코너에는 큼지막한 로고와 선명한 색,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술인지 단번에 알려주는 병들이 많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 사이에서 조금 엉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래된 물레방앗간 그림, 누렇게 바랜 종이처럼 보이는 라벨, 손으로 끄적인 듯 삐뚤빼뚤한 글씨. 세련됐다고 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촌스럽다고 쉽게 넘기기도 어려웠다.
누군가 켄터키의 낡은 창고 한구석에서 병 하나를 꺼내 와 손수 라벨을 붙여놓은 것 같은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그렇게 처음 버번 코너에서 이 녀석을 집어 든 것이 벌써 1년이 넘었다.
15년이라는 말에 쉽게 흔들리던 때
처음 Noah’s Mill을 샀을 때의 나는 지금보다 버번을 훨씬 몰랐다.
이 술이 예전에는 15년 숙성 표기를 달고 나왔고, 지금은 정확한 숙성 연수를 적지 않는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그 뒤에는 여러 숙성 연수의 원액이 섞인다는 말도 따라붙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내용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당시의 나는 ‘15년 이상 숙성된 원액’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에 꽤 쉽게 설득당했던 것 같다.
첫 병을 열고 마시면서는 그저 감탄했다.
도수는 높고, 맛은 진하고, 잔을 비우고 나면 입안에 남는 느낌도 묵직했다.
그래서 별다른 분석도 없이 “우와, 우와” 하면서 마셨다.
그때의 나는 술의 맛 자체보다, 이 병이 들려주는 오래된 버번의 이야기까지 함께 마시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병 앞에서는 괜히 더 까다로웠다
두 번째 병을 열기 전에는 반대로 조금 이상한 선입견이 생겼다.
예전과 달리 어린 원액도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물론 병 안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내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두 병 마신 경험만으로 배치의 차이를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런데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첫 번째 병에서는 15년이라는 숫자에 기대어 감탄했으면서, 두 번째 병에서는 ‘혹시 어린 원액이 들어가서 그런가? 맛이 예전보다 가벼운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우습다.
버번의 ㅂ도 제대로 모르던 시절에, 내가 들은 말 몇 마디를 기준으로 술의 맛을 재단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두 병을 비우는 동안 내 쪽도 조금은 달라졌다.
고도수 버번을 마시는 일이 예전보다 낯설지 않아졌고,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은 스피릿을 마셔본 사람이다.
무엇이 좋은 술인지 단정할 만큼 대단한 경험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병에 붙은 숫자나 남의 평가보다 내 잔 안에서 느껴지는 것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됐다.
그래서 병에서 겨우 쥐어짜낸 마지막 한 잔은 처음 두 병을 마실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마셨다.
첫 번째 병을 열던 날의 들뜸도 없었고, 두 번째 병을 앞에 두고 괜히 까다롭게 굴던 마음도 없었다.
그냥 이제 거의 끝나가는 술 한 잔과, 그 술을 처음 만났던 1년 전의 나를 함께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불에 데이는 듯한 열기 뒤에 밀려오는 것
Noah’s Mill은 여전히 뜨거웠다.
57.15%라는 도수는 마지막까지 절대 얌전히 자기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입에 넣는 순간에는 불에 데이는 듯한 열감이 한 번 세게 밀고 들어오고, 잠깐 방심하면 향이나 맛보다 알코올의 존재감이 먼저 남는다.
그런데 그 열기가 지나간 뒤가 이 술의 재미다.
내게는 봄철 남쪽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어느 순간 한꺼번에 북쪽으로 확 밀고 올라오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연유처럼 진하고 눅진한 단맛이 피어오르고, 그 사이에 계피 같은 따뜻함이 섞인다.
여기에 옅지만 손으로 짓이겨진 풀잎 같은 향이 슬쩍 따라온다.
평소라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법한 방향인데도, 이 술 안에서는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조금 낯선 풋내가 단맛이 너무 무겁게 내려앉지 않게 붙잡아 주는 것 같았다.
조금 이상해서 더 기억나는 버번
그래서 Noah’s Mill은 내게 깔끔하게 정리된 버번이라기보다, 조금은 투박하고 제멋대로인 버번으로 남는다.
병부터 그렇고, 첫인상도 그렇고, 잔 안에서 풍미가 밀려오는 방식도 그렇다.
좋아하는 향과 맛만 예쁘게 모아 놓은 술은 아니다.
거칠고 뜨겁고, 어떤 날은 조금 어수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어수선함 속에 분명히 이 녀석만의 매력이 있다.
싫어할 법한 요소까지도 묘하게 한 덩어리로 묶어, 결국은 한 잔 더 마셔보고 싶게 만든다.
처음에는 오래된 원액이라는 이야기에 끌렸고, 두 번째에는 근거도 충분하지 않은 소문 때문에 괜히 실망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술 자체의 성격이 남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까
지금은 Little Book Batch 6, 7, 8과 Booker’s 몇 가지 배치가 줄을 서 있다.
Stagg과 Pappy까지 생각하면 앞으로 마셔야 할 술도 많다.
그러니 당장 Noah’s Mill을 다시 한 병 사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술장에 있는 병들이 하나씩 줄어들고,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선택지들마저 언젠가 더는 쉽게 구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다시 이 투박한 병을 찾아볼지도 모르겠다.
병을 집어 들고 처음처럼 라벨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 너도 다시 한 번 마셔보자” 하고 데려올 것 같다.
두 병을 비운 뒤에도 Noah’s Mill을 완전히 알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제는 이 술을 15년이라는 숫자나 어린 원액에 대한 소문으로 기억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게 Noah’s Mill은 불에 데이는 듯한 작열감 뒤로, 봄꽃처럼 풍미가 한꺼번에 밀려오던 버번이다.
조금 이상하고, 조금 거칠고, 그래서 오히려 오래 남는 녀석.
마시는 속도가 구입하는 속도를 못 따라가는 나인데…
과연 세 번째 병을 살 기회가 올 것인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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