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venie DoubleWood 17년 리뷰: 단종되어 더 아쉬운, 묵직하게 나이 든 Balve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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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과의 첫 만남에는 역시 한 사람이 끼어 있다.
내 위스키 사부(?) 유민이다.

그때의 나는 나름 위스키를 좀 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Macallan을 즐겨 마셨고, Royal Salute도 좋아했다.
거기에 당시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던 GlenDronach까지 알고 있었으니 속으로는 은근히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나? 이제 위스키 좀 아는 거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렇게 허황된 ‘위잘알’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어느 날, 유민이가 말했다.

“형님, 발베니 17년 한번 드셔보시죠.”

발베니?
물론 Balvenie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DoubleWood 12년도 이미 알고 있었고, 몇 번 마셔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병을 바라봤다.

“이게 그렇게 맛나다고?”

그리고 한 잔을 마셨다.

음……. 맛있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지 이제는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시에는 꽤 쉽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 술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그렇지 않은 술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술이 바로 발베니 더블우드 17년, The Balvenie DoubleWood 17 Year Old였다.

어느 날 뒤늦게 들은 단종 소식

The Balvenie DoubleWood 17 Year Old는 2012년 출시된 제품이다.

Balvenie의 오랜 Malt Master였던 David Stewart가 증류소에서 50년을 보낸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으며, DoubleWood 12년의 숙성 아이디어를 17년 제품으로 확장한 표현이었다.
처음 American oak에서 숙성한 뒤 European oak sherry cask로 옮겨 추가 숙성하는 방식이다.
당시 공식 설명에서도 12년과 같은 honeyed하고 spicy한 성격을 공유하면서도, 더 깊은 vanilla와 richer한 풍미를 가진 제품으로 소개됐다.

그런데 이 녀석은 영원히 Balvenie 라인업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처럼 보이다가 사라졌다.
2021년 Spirit of Speyside 행사에서 DoubleWood 17의 단종 계획이 알려졌고, 이후 더 이상 정규 생산되는 제품이 아니게 됐다.

문제는 내가 그 소식을 꽤 늦게 들었다는 것이다.

“뭐? 17년 단종됐다고?”

그제야 마음이 급해졌다.
평소에는 언제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유를 부리던 사람이 더 이상 쉽게 구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처럼 느끼기 시작한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여기저기 리쿼샵에 연락을 돌리고 재고가 있다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힘들게 두 병을 구했다.
그리고 그중 한 병은 이 술을 처음 알려준 유민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투척했다.

생각해보면 꽤 적절한 귀환이었다.

내게 이 술을 알려준 사람이 결국 내가 겨우 찾아낸 마지막 병 가운데 하나를 가져갔으니까.

그리고 남은 한 병은 정말 아끼고 아껴가며 마셨다.
더 이상은 쉽게 구할 수 없는 술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잔에 따를 때마다 전보다 조금씩 소심해졌다.

그런데 7병이 왜 거기서 나와?

그렇게 귀하게 한 병을 아껴 마시고 있었는데….

어느 날이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들어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낡고 허름한 리쿼샵이 하나 있었다.

요즘 새로 생기는 리쿼샵처럼 조명이 번쩍이지도 않고, 유명한 위스키들이 예쁘게 전시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냥 오래된 술병들이 선반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별 기대 없이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올 법한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눈에 뭔가 익숙한 병이 들어왔다.

Balvenie DoubleWood 17. 두둥~!!

한 병이 아니었다.
뒤에도 있었다.
또 있었다.
세어보니 일곱 병.

잠깐 고민했던 것 같다.
정말, 아주 잠깐.
결론은 간단했다.

“이거 다 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나는 단종된 술 한 병을 아껴 마시던 사람에서 갑자기 Balvenie DoubleWood 17 재고를 개인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적어도 당분간은 조금 여유롭게 마실 수 있다는 만족감에,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꿀, 사과, 넛, 바닐라

발베니 17년을 마시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아주 낯선 맛이 아니다.

오히려 익숙하다.
꿀, 사과, 바닐라, 견과류, 그리고 부드러운 오크.
DoubleWood 12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겹치는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공식 테이스팅 노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Nose에서는 oak, vanilla, honey와 green apple이 언급되고, palate에서는 dried fruit, toasted almond, cinnamon, creamy toffee, oak와 deep vanilla가 중심에 놓여 있다.

실제로 내 잔에서도 꿀과 바닐라는 상당히 선명하다.
그 사이에 풋사과처럼 살짝 산뜻한 과일 향이 끼어들고, 뒤쪽에서는 아몬드 같은 고소함과 나무의 느낌이 따라온다.

그런데 내게 재미있는 부분은 셰리 캐스크를 거쳤음에도 셰리 위스키의 느낌이 전면에 서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말린 과일이나 향신료의 흔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GlenDronach처럼 셰리가 전체를 끌고 가는 술은 아니다.
내 입에서는 오히려 첫 숙성에서 만들어진 꿀, 바닐라, 과일, 오크 쪽의 골격이 더 선명했고 그 위에 셰리 캐스크가 두께와 향신료를 한 겹 더 얹어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을 마실 때마다 12년과 분명히 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긴 것도 닮았고 목소리도 닮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형제.

Balvenie DoubleWood 12년과 17년, 단순히 5년 차이만은 아니다

처음에는 나도 단순하게 생각했다.
DoubleWood 12가 맛있으니까 17년은 그냥 그 맛이 조금 더 깊어진 버전 아닐까?

실제로 두 제품에는 분명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꿀과 바닐라의 부드러운 단향.
사과 같은 과실감.
견과류와 오크.
셰리 캐스크에서 따라오는 약간의 건과일과 스파이스.

그런데 17년을 마시면 단순히 그것들이 더 강해졌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향의 볼륨만 커진 게 아니다.
술 전체의 체급이 조금 달라진다.
더 두껍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 무겁다고 해야 할까.
혹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고 해야 할까.

알코올 도수는 43%라 숫자만 놓고 보면 전혀 위협적인 술이 아니다.

그런데 입안에 들어왔을 때의 존재감은 숫자보다 묵직하다.
12년이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쪽이라면, 17년은 한 발짝 뒤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 느낌이다.

달콤함은 있는데 가볍지 않고, 부드러운데 얇지 않다.

양아치도 반달도 아닌, 40대 중반 중간보스

이 맛을 뭐라고 설명할까 한참 생각해봤다.

중후함은 너무 뻔했다.
묵직함은 맞긴 한데 뭔가 부족하다.
깊다는 표현도 맞긴 하지만 정확히 내가 느끼는 그림은 아니다.

그러다 결국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이 하나 있었다.
양아치도 아니고, 동네 반달도 아니다.
그렇다고 최종 보스처럼 방에 혼자 앉아 있는 회장님도 아니다.

산전수전 꽤 겪은 40대 중반의 중간보스.
딱 그런 느낌이다.
큰소리를 칠 필요가 없다.
굳이 자기 힘을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먼저 눈치를 보는 그런 사람.

발베니 17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내게는 그렇다.

12년보다 단맛이 몇 퍼센트 더 많고 오크가 몇 퍼센트 더 강하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보다,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가 나이를 먹었다.
꿀과 바닐라가 있고 사과와 견과류도 있는데, 그 각각이 따로 튀어나오기보다 오래된 오크 안에서 한 덩어리로 묶여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첫 모금보다 두 번째 모금이 좋고, 두 번째보다 잔에 조금 남겨두고 천천히 마시는 후반부가 더 좋다.

DoubleWood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술

DoubleWood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오크 캐스크를 거치는 Balvenie의 숙성 방식에서 왔다.
American oak에서 오랜 숙성을 거친 뒤 European oak sherry cask로 옮겨 두 번째 숙성을 하는 방식으로, David Stewart가 발전시킨 cask finishing 기법을 대표하는 제품 가운데 하나다.

DoubleWood 17 역시 같은 기본 철학에서 만들어졌다.
마셔보면 왜 굳이 두 번째 캐스크가 필요한지 조금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American oak에서 만들어진 바닐라 중심의 부드럽고 달콤한 골격만 있었다면 꽤 편안한 위스키가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셰리의 존재감이 훨씬 강했다면 방향 자체가 다른 위스키가 됐을 것이다.

17년은 그 중간에 있다.
내게는 셰리가 주인공이라기보다 조연에 가깝다.
하지만 그 조연이 빠지면 지금 느껴지는 깊이와 무게도 사라질 것 같다.

셰리가 바닐라와 꿀의 달콤함을 적당히 눌러주고, 오크와 견과류 사이에 말린 과일과 스파이스를 슬쩍 끼워 넣는다.

그래서 모든 맛을 하나씩 뜯어보기보다 그냥 한 모금을 천천히 굴려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정말 맛있다. 그런데 지금 가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까지 읽으면 당연히 결론은 하나처럼 보인다.

“그럼 보이면 무조건 사야 하나?”

그건 또 아니다.

이 녀석은 정말 맛있다.
내 취향에도 잘 맞고, 개인적인 기억까지 더해져서 앞으로도 오래 좋아할 술이다.

하지만 단종된 술에는 아주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생긴다.
맛과 가격이 더 이상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생산될 당시에는 그 가격을 기준으로 다른 위스키들과 비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산이 멈추고 남아 있는 병만 시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술의 맛이 갑자기 두 배 좋아진 것은 아닌데 병의 희소성에는 가격이 붙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얼마나 맛있는 녀석인가’보다 ‘이 가격을 주고도 마실 것인가’를 먼저 묻게 된다.

내 대답은 조금 복잡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Balvenie DoubleWood 17이라면 아주 행복하게 마실 것이다.
한 잔 따르고, 향을 맡고, 꿀과 바닐라와 사과와 견과류가 섞이는 것을 천천히 즐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단종 프리미엄이 잔뜩 붙은 가격을 주고 새로 한 병을 사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많이 고민할 것 같다.
그 가격대에는 정말 맛있는 위스키가 너무 많다.
게다가 그중에는 굳이 리쿼샵 구석구석을 뒤지지 않아도 쉽게 살 수 있는 녀석들도 많다.

그래서 이 술의 가장 아쉬운 점은 맛이 아니다.

더 이상 마음 편하게 추천할 수 없는 술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게 가장 아쉽다.

그래도 내 술장에서는 아직 현역이다

처음 이 술을 권해준 유민이.

“이게 맛나다고?” 하면서 별 기대 없이 마셨던 첫 잔.

나중에 단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어렵게 찾아낸 두 병.

그중 한 병을 유민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던져주고, 남은 병을 한 잔 한 잔 아껴 마시던 시간.

그리고 어느 허름한 리쿼샵에서 우연히 발견한 일곱 병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 주세요.”라고 외치던 내 모습.

지금 생각해보면 Balvenie DoubleWood 17을 기억하게 만드는 건 꿀이나 사과, 바닐라와 오크만은 아닌 것 같다.

술을 오래 마시다 보면 어떤 병은 맛보다 이야기가 먼저 떠오른다.
이 녀석도 그렇다.
물론 맛있다.
아주 맛있다.
12년의 편안하고 달콤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 더 낮고 굵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지만 잔을 비우고 나면 이상하게 존재감이 남는다.

그래서 아마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 조금씩 마실 것 같다.
예전처럼 이거 다 마시면 어쩌나 하면서 한 방울 한 방울 벌벌 떨 필요까지는 없다.
다행히도 일곱 병이나 더 쟁여놨으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그 녀석들도 한 병씩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더 아쉬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스튜어트 형아!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놓고 왜 없앤 거야.
그냥 계속 만들어주면 안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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