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수 매장 신상 코너를 둘러보다 보면 요즘 유독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다.
피스타치오, 바닐라 버번, 토스트한 마시멜로, 캐러멜 같은 음식이나 디저트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향은 무겁고 쉽게 질린다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2026년 향수 시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향이 중요한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향수 트렌드를 분석하는 Spate는 2026년 주요 향수 트렌드로 구르망(gourmand), 바닐라, 아라비안 스타일 향수를 꼽고 있으며, 특히 피스타치오·카라멜·꿀 같은 노트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향수 매장에서 느끼는 변화가 단순한 기분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구르망 향수는 무엇이고, 왜 다시 뜨고 있을까
구르망(gourmand)은 프랑스어로 ‘미식가’를 뜻하는 단어다.
향수에서는 바닐라·카라멜·초콜릿·꿀·커피·마시멜로처럼 음식이나 디저트를 연상시키는 향을 중심으로 한 계열을 가리킨다.
구르망 향수가 1992년에 갑자기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티에리 뮈글러의 ‘엔젤(Angel)’은 현대적인 구르망 향수 장르를 대중화한 대표적인 제품으로 꼽힌다.
엔젤 이전에도 바닐라를 비롯한 달콤한 향료는 향수에 널리 쓰였지만, 엔젤은 설탕과 디저트를 연상시키는 향을 향수의 중심에 강하게 드러내면서 이후 구르망 계열이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지금 유행하는 구르망 향수는 예전처럼 단순히 ‘달고 무거운 향’만을 뜻하지 않는다.
2026년에는 피스타치오에 타바코를 더하거나, 바닐라 버번에 레더를 섞고, 마시멜로를 앰버와 연결하는 식으로 달콤한 노트에 우디·레더·앰버·스파이스 같은 요소를 더한 조합이 주목받고 있다.
Spate도 이런 흐름을 ‘sophisticated gourmand’로 설명하면서 소비자들이 단순히 사탕처럼 달기만 한 향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깊이 있는 구르망을 찾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 흐름에는 향수를 발견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백화점이나 향수 매장에서 브랜드를 먼저 보고 향을 시향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에서 ‘피스타치오 향수’, ‘바닐라 앰버 향수’, ‘마시멜로 향수’ 같은 특정 향조를 먼저 발견한 뒤 제품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Spate는 2026년 향수 시장에서 이런 ‘브랜드 중심 검색’보다 ‘향료와 노트 중심의 발견’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라따파(Lattafa)처럼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가격대의 중동계 브랜드와 카얄리(Kayali) 같은 브랜드가 SNS에서 빠르게 알려진 것도 이런 변화와 맞물려 있다.
고가의 니치 향수를 사지 않아도 개성이 강하고 달콤한 향을 경험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진 것이다.
실제 데이터에서도 구르망 향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2026년 Spate의 검색·소셜 데이터에서도 구르망 향수의 상승세가 확인된다.
특히 피스타치오 관련 향수 관심도는 전년 대비 852.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Spate의 2026 Fragrance Report 역시 피스타치오, 카라멜, 꿀, 말차 등을 빠르게 성장하는 향수 노트로 소개하고 있으며, 바닐라와 구르망 향을 올해 향수 시장을 움직이는 주요 방향으로 보고 있다.
바닐라 역시 단순한 ‘바닐라 향수’보다 바닐라 버번, 토스트한 바닐라처럼 좀 더 구체적인 표현과 조합으로 검색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소비자가 브랜드 이름보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향의 재료와 분위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변화다.
다만 이런 숫자를 실제 판매량과 동일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Spate 자료는 구글 검색과 틱톡·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검색하고 이야기하는지를 분석한 데이터이기 때문에, 특정 향수가 실제 매장에서 몇 병이나 팔렸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아니다.
또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검색·소셜 트렌드가 한국 향수 시장의 취향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피스타치오와 바닐라 향수가 ‘가장 많이 팔린다’고 단정하기보다는, 현재 온라인에서 소비자의 관심이 가장 빠르게 커지고 있는 향조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바닐라는 왜 오래 남고, 계절과 피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까
구르망 향수를 이야기할 때 바닐라가 유독 자주 등장하는 데에는 향 자체의 특성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향수는 뿌린 직후부터 여러 향 성분이 서로 다른 속도로 증발하면서 향의 인상이 계속 바뀌는데, 일반적으로 가볍고 휘발성이 높은 성분은 먼저 느껴지고 상대적으로 덜 휘발되는 성분은 뒤까지 남는다.
그래서 향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탑노트에서 베이스노트 쪽으로 달라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바닐라 향을 만드는 데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바닐린(vanillin)은 증기압이 낮은 물질로, 비교적 천천히 휘발하는 성질을 갖는다.
이 때문에 바닐라 계열의 향은 여러 향수에서 드라이다운 단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만드는 데 자주 활용된다.
다만 ‘바닐라가 들어갔으니 반드시 오래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향수의 지속력은 특정 노트 하나가 아니라 전체 조향 구성과 부향률, 사용량, 피부와 환경 조건 등이 함께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계절도 향을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온도가 높아지면 향 성분의 증발과 확산이 빨라질 수 있기 때문에, 같은 향수라도 더운 날에는 향이 더 빠르고 강하게 퍼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바닐라·앰버·카라멜처럼 따뜻하고 묵직한 인상을 주는 향은 한여름에는 다소 답답하거나 지나치게 달게 느껴지는 반면, 서늘한 가을과 겨울에는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같은 향수가 계절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도 결국 향 분자의 휘발과 확산 조건이 달라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만 이것 역시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다.
구르망 향이라고 해서 여름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가볍게 구성된 바닐라나 과일 중심의 구르망 향수는 따뜻한 계절에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시향지와 피부에서 향이 달라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종이 시향지는 비교적 일정한 표면이지만 사람의 피부는 온도와 수분, 유분 상태가 모두 다르다.
따라서 매장에서 종이에 뿌렸을 때는 산뜻하고 크리미했던 바닐라가 피부에서는 더 진하고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예상보다 부드럽게 남을 수도 있다.
향수가 피부에서는 왜 다르게 느껴지는지 궁금하다면 향수는 왜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까?에서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특히 구르망처럼 단맛의 존재감이 큰 향수는 처음 몇 분의 향보다 몇 시간 뒤 피부에 남은 향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구르망 향수를 고른다면
구르망이라는 향의 종류와 EDT·EDP·Parfum 같은 향수의 농도는 별개의 개념이다.
달콤하고 진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구르망 향수가 모두 EDP나 파퓸인 것은 아니다.
같은 구르망 계열에서도 EDT부터 EDP, Parfum까지 다양한 농도의 제품이 나올 수 있고, 부향률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더 좋은 향이나 더 강한 향이 되는 것도 아니다.
EDT와 EDP의 차이를 알고 보면 향수를 선택할 때 농도 표시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처음 구르망 향수를 시도한다면 매장에서 한 번 맡아보고 바로 큰 병을 구입하기보다는 샘플이나 작은 용량으로 하루 정도 사용해보는 편이 좋다.
처음 뿌렸을 때 마음에 들었던 피스타치오나 바닐라 향이 두세 시간 뒤에는 앰버나 우디 노트와 섞이면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향수 시장에서는 미니 사이즈와 디스커버리 세트를 이용해 여러 향을 경험한 뒤 구매하는 소비도 늘고 있다.
니치 향수가 비싸도 계속 관심을 받는 이유를 살펴봐도 향수를 한 병의 가격이나 브랜드만으로 선택하기보다 여러 향을 직접 경험하려는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구르망 향이라면 특히 손목이나 팔에 직접 뿌린 뒤 처음 향, 한두 시간 뒤의 향, 하루가 끝날 무렵 남아 있는 잔향까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2026년 데이터를 보면 피스타치오와 바닐라를 중심으로 한 구르망 향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검색량이나 틱톡에서의 화제성이 높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향을 궁금해한다는 뜻이지, 그 향이 누구에게나 잘 맞는다는 뜻은 아니다.
향수의 유행은 새로운 향을 발견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마지막 선택은 결국 내 피부에서 몇 시간 동안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그 잔향을 다시 맡고 싶은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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