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번을 마시는 내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끔은 내가 제일 먼저 조금 낯설어진다.
한동안 나는 스카치만 마시는 사람이었다.
위스키를 고를 때도 습관처럼 스코틀랜드 쪽을 먼저 봤고, 셰리 캐스크에서 오는 묵직한 단맛이나 오래된 나무장 안을 열었을 때처럼 천천히 퍼지는 오크 향을 좋아했다.
말린 과일과 견과류가 입안에서 시간을 두고 모습을 바꾸는 느낌도 좋았다.
버번을 아예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끔이었다.
달큰한 바닐라와 캐러멜, 새 오크에서 오는 선명한 나무 향, 한 모금 뒤에 따라오는 약간의 열기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내 잔은 이상하게도 늘 다시 스카치 쪽으로 돌아갔다.
그랬던 내가 버번을 조금씩 마시기 시작한 것은 유민이, 에릭이, 그리고 쿠씨네 부부의 영향이 컸다.
누군가는 좋은 병을 열어줬고, 누군가는 내가 잘 모르던 이름을 이야기해줬으며, 또 누군가는 버번을 이렇게 마셔야 한다고 가르치기보다 자기 잔을 내 앞으로 슬쩍 밀어줬다.
그렇게 한 잔씩 얻어 마시고, 한 병씩 사보고, 다음 병을 궁금해하다 보니 어느새 3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권해줘서 마시던 술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입이 심심할 때도 버번을 따라 혓바닥 위에서 천천히 굴리는 사람이 됐다.
그런 밤이 있다.
해야 할 일은 아직 남아 있는데 그렇다고 더 집중할 마음은 나지 않고, 하루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어서 바로 잠들기에는 조금 아쉬운 시간.
불을 조금 낮추고, 잔에 술을 많이 따르지는 않은 채 그냥 손에 들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진다.
Widow Jane 10년은 내게 그런 시간에 잘 어울리는 술이었다.
이 술을 마실 때마다 대단한 맛을 발견한다기보다, 내가 버번을 마시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브루클린의 이름을 달고, 조금은 다른 곳에서 온 술
Widow Jane은 브루클린에 증류소가 있고, 좋은 미네랄 워터를 쓴다는 이야기를 꽤 자신 있게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이름만으로도 브루클린에서 만들어진 버번, 뉴욕의 공기와 물이 담긴 술 같은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병은 켄터키와 테네시, 인디애나에서 온 원액들을 블렌딩한 위스키다.
이곳의 시그니처라고 불리는 병이 정작 다른 증류소에서 데려온 원액들을 섞어 만든 술이라는 점은, 솔직히 말하면 살짝 불만이다.
맨날 좋은 미네랄 워터를 자랑하면서 대표 병은 맨날 딴 증류소에서 갖고 온 애들을 블렌딩한다니.
‘그래도 언젠가는 너희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원액을 제일 앞에 내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잔에 따라놓고 마셔보면, 그 마음을 오래 붙들고 있기가 또 애매하다.
어디에서 온 원액이든 잘 섞어놓으니 한 잔 안에서는 꽤 자연스럽게 하나의 분위기를 만든다.
개인적으로 버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시트러스도 아주 살짝 느껴지는데, 그 가느다란 산뜻함 덕분에 이 술의 단맛이 혼자 앞서가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조금 삐딱하게 보던 부분도 그래서 더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브루클린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 안에는 켄터키와 테네시, 인디애나에서 온 시간들이 함께 들어 있다.
자기 출신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술인데, 막상 잔 안에서는 그 애매함이 거슬리기보다 묘하게 부드럽게 남는다.
사람도 술도 너무 한 가지 모습으로만 딱 정리되면 재미가 없을 때가 있다.
조용하게 시작해서 코코아 닙스로 남는 한 잔
45.5도라는 도수를 보면 아주 가벼운 위스키는 아니다.
그래서 처음 잔을 들었을 때는 조금 더 버번다운 선명함을 예상했다.
혀를 톡 치는 알코올감과 달큰한 바닐라, 오크와 스파이스가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는 느낌 말이다.
그런데 Widow Jane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시작한다.
버번 특유의 쨍한 느낌은 크지 않고, 오히려 45.5도라는 숫자에 비해서도 약간 밋밋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한 모금을 조금 더 오래 머금고 있으면, 그 밋밋함이 비어 있는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잠깐 화끈거리는 매콤함이 지나가고, 그 자리를 달면서도 쌉쌀한 코코아 닙스의 풍미가 채운다.
설탕을 많이 넣은 초콜릿이라기보다, 씹을수록 쓴맛과 고소함이 같이 남는 코코아 닙스에 가깝다.
그 쌉쌀함이 입안을 조용히 감싸고 나면, 처음에는 얌전하다고 느꼈던 술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크게 말하지 않았을 뿐, 자기 방식대로 남아 있던 술이었다.
처음보다 잔을 내려놓은 뒤가 더 궁금했던 술
처음에는 솔직히 조금 얌전한 버번이라고 생각했다.
45.5도라는 숫자를 보고 기대했던 쨍한 열기나, 한 모금만으로도 “그래, 이게 버번이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선명함은 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막상 잔을 내려놓고 나면 이상하게 그 첫인상만으로 이 술을 끝내기가 어려웠다.
혀끝에는 코코아 닙스 같은 쌉쌀함이 남아 있었고, 그 뒤 어딘가에는 바닐라와 아주 가느다란 시트러스가 같이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Widow Jane은 처음 잔보다 그다음 생각이 더 궁금한 술이었다.
한 번 마시고 강하게 기억을 남기는 술은 아니지만, 조금 지나 다시 잔을 들면 아까는 잘 보이지 않던 결이 하나씩 느껴진다.
처음에는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조용함도, 나중에는 괜히 힘을 주지 않는 여유처럼 보인다.
버번을 마실 때마다 꼭 한 방에 납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 술은 아주 천천히 알려주는 것 같았다.
바닐라는 내게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는 잘 익은 바나나에 가까웠다.
조금 더 노랗고 부드럽지만 과하게 달지는 않은 바닐라, 그리고 그 뒤에 아주 미약하게 남는 아세톤 같은 느낌.
아세톤이라는 단어만 놓고 보면 좋은 표현처럼 들리지는 않지만, 내게는 그 작은 흔적이 오히려 반가웠다.
바나나와 바닐라, 코코아 쪽으로 너무 부드럽게 흘러가던 술이 마지막에 아주 작게 “난 그래도 뿌리는 버번이요”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크지 않아서 좋았고, 그래서 이 술이 버번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게 됐다.
언젠가 브루클린에서 다시 마셔보고 싶은 이유
브루클린에 Widow Jane 증류소가 있다는데, 가까운 곳일수록 이상하게 더 미루게 된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날씨가 조금 더 좋아지면 가야지, 시간이 조금 더 나면 가야지 하며 자꾸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러다 보면 몇 달이 지나고 계절도 바뀌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 이상하게도 이미 아는 이름처럼 마음속에 남는다.
이 술을 마실 때마다 언젠가는 꼭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가끔 생각해보면, 처음 버번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의 나는 이런 병을 혼자 따라 마실 거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누가 권해준 잔에서 맛을 보고, 좋은 병이 있으면 같이 열어보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는 별일 없는 밤에도 자연스럽게 병을 꺼내고, 한 모금을 머금은 뒤 오늘은 어떤 향이 더 남는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버번이 내게 익숙해진 것은 맛을 많이 알게 돼서라기보다, 그 술을 마시는 시간이 어느새 내 일상 안에 조용히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이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물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
브루클린이라는 이름과 다른 곳에서 온 원액들이 한 병 안에서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지금 내가 혼자 있는 밤에 느끼는 이 조용한 맛이 그곳에서는 또 어떻게 다가올지도 궁금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코코아 닙스가 먼저 떠오를지, 아니면 증류소의 공기와 그날의 기분 때문에 전혀 다른 향이 기억날지는 모르겠다.
다만 Widow Jane 10년은 내게 스카치만 찾던 사람이 어느새 아무 일 없는 밤에도 버번을 따르게 된 시간과 함께 남을 것 같다.
아주 잠깐 지나가는 매콤함, 너무 버번버번 하지 않은 바나나 같은 바닐라, 달면서도 쌉쌀하게 입안을 감싸는 코코아 닙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천천히 굴리며, 좋은 술 한 잔은 가끔 맛보다 먼저 사람과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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