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 Small Batch 리뷰: 이름은 1792년인데, 태어난 건 2002년인 버번

작성자

카테고리:

,

매일 슬라이드 위에서 진실을 확인하는 게 내 일이다.
조직을 얼려 자르고, 그 얇은 한 겹 안에 숨은 답을 들여다보는 게 직업이면서도,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병 하나가 던지는 거짓말에는 무장 해제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
진단서에는 근거 없이는 한 줄도 못 쓰는 사람이, 병에 새겨진 숫자 하나에는 그냥 속아주고 싶어지는 밤이 있다.

그날 밤 유리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건 오픈한 후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완병을 해버린 1792 스몰배치 병이었다.
조명이 낮게 깔린 거실에서, 통유리에 금박으로 박힌 그 네 자리 숫자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라벨 하나 없이도 병 전체가 이미 자기소개를 끝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뒷조사를 시작했다.

라벨 없이도 뻥카를 칠 수 있게 생긴 병

“1792”라는 숫자는 보자마자 숙성 연도처럼 읽혔다.
마치 저 숫자가 새겨진 순간부터 오크통 안에서 조용히 나이를 먹어온 것처럼, 병은 실제보다 훨씬 깊은 세월을 등에 지고 있는 척을 했다.
위스키를 잘 모르는 후배에게 선물하면서 “이거 50년 된 거야”라고 능청스럽게 뻥을 쳐도, 상대는 그 숫자의 무게에 눌려 순순히 먹혀줄 것 같았다.
진짜와 그럴싸함 사이의 그 아슬아슬한 틈이 재밌어서, 나는 슬쩍 술의 뒤를 캐보기로 했다.

켄터키의 나이를 빌려 온 숫자

뒷조사의 결과는 조금 허탈했다.
1792는 이 술을 만든 증류소의 나이가 아니라, 켄터키가 버지니아의 품을 떠나 미국의 열다섯 번째 주로 홀로서기를 한 해였다.
정작 이 술을 세상에 내놓은 바튼 증류소는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1800년대 후반에야 문을 열었으니, 병은 자신의 나이가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땅의 나이를 빌려 입고 있었던 셈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병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느꼈던 그 그럴싸한 무게감이, 조금씩 벗겨지는 오래된 도금처럼 얇아지는 게 느껴졌다.

2002년, 켄터키와 서울이 겹치던 순간

하지만 진짜 반전은 그 다음에 있었다.
1792라는 이름을 달고 이 버번이 세상에 처음 나온 해는, 놀랍게도 2002년이었다.
켄터키라는 땅이 그 숫자를 얻은 지 210년이 지나서야, 한 병의 술이 그 숫자를 이름으로 빌려 입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2002년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자동으로 다른 장면 하나를 데려온다.
태극전사들이 4강까지 오르며 온 나라가 붉은 물결로 뒤덮였던 그 여름, 비록 난 강원도 화천에서 말년 병장 생활을 하며 위병조장을 서느라 그 최고의 게임이었던 이탈리아전을 못 봤지만, 지구 반대편 켄터키의 어느 증류소에서는 이 병이 아무도 모르게 금박으로 된 숫자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함성과 이 병의 탄생이 같은 계절, 같은 해 어딘가에서 조용히 겹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제는 이 병을 볼 때마다 그 여름의 함성이 아주 작게, 잔 속에서 다시 울리는 것 같다.

바닐라와 카라멜, 그 이상은 없다

정작 잔에 따라 마셔보니 이 술은 자신이 짊어진 두 개의 서사에 비해 겸손할 정도로 무난하다.
바닐라와 카라멜이 먼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 뒤로 아세톤 같은 알코올의 뒷맛이 살짝 뒤따라온다.
라이가 소량 들어가서인지 짓이겨진 풀의 풋풋한 향도 은근히 스치고 지나가는데, 46.85도라는 도수를 생각하면 오히려 자극이 크지 않게, 누군가 다정하게 다듬어놓은 느낌이다.
화려한 이름값을 기대했던 입장에서는 살짝 심심하지만, 그 심심함이 오히려 이 병을 오래 곁에 둘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되어준다.

결국 남는 건 여름의 하이볼 한 잔

그래서 이 병은 아껴 마시며 감탄하는 술이 아니라, 여름날 무심히 만들어 마시는 내 시그니처 하이볼이나, 가끔 손이 가는 올드패션드 속으로 부담 없이 녹아드는 술로 자리를 잡았다.
결국 병에 새겨진 1792라는 숫자는 켄터키의 나이도, 증류소의 나이도, 심지어 이 술 자신의 나이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그럴싸한 거짓말을 한 번 걸어볼 수 있게 해주는 숫자, 그리고 나에게는 2002년 여름의 함성을 잔 속으로 조용히 불러오는 숫자로 남았다.
병은 비었지만, 그 여름은 여전히 잔 속에서 식지 않고 있었다.

새 글 알림 받기

관심 있는 주제를 선택하면 새 글이 올라올 때 이메일로 알려드립니다.

받고 싶은 주제를 선택해 주세요.

코멘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