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커피는 맛보다 먼저 장면으로 기억된다.
유난히 일찍 어두워진 오후.
창밖은 아직 완전히 밤이 된 것은 아닌데, 방 안의 빛은 벌써 조금씩 가라앉아 있다.
해야 할 일은 남아 있고, 그렇다고 새로 무언가를 시작할 마음도 선뜻 생기지 않는 시간.
그럴 때는 손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Cuvee Coffee의 West Pole은 그런 시간에 잘 어울리는 커피였다.
처음 이름을 봤을 때부터 조금 재미있었다.
West Pole.
어딘가 바람이 차갑고, 하늘은 낮고, 집 안에는 두꺼운 담요와 나무 타는 냄새가 있을 것 같은 이름.
패키지에 적힌 Bold & Smoky라는 말도 그런 상상을 더했다.
진하고 스모키한 다크 로스트라면, 아마 조용한 날의 끝에 어울리는 커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원두를 사면 대부분 에스프레소부터 내려 마신다.
짧은 한 모금 안에 그 원두가 가진 기분이 제일 솔직하게 들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West Pole도 처음에는 작은 잔에 담아 마셨다.
커피가 잔에 떨어지는 동안 퍼지는 향부터 이미 조금 어두운 쪽이었다.
하지만 그 어두움이 차갑거나 무거운 느낌은 아니었다.
첫 모금에서는 진한 다크 초콜릿과 몰라세스 같은 단맛이 느껴졌다.
어두운 갈색의 단맛이라고 해야 할까.
설탕처럼 밝게 올라오는 단맛이 아니라, 천천히 끓여 농축한 시럽처럼 묵직하고 깊은 단맛이었다.
그 뒤에 살짝 스치는 오렌지 껍질 같은 산미와 마른 향신료의 느낌이 있어서, 다크 로스트인데도 맛이 한 방향으로만 가라앉지는 않았다.
이 원두가 좋았던 이유는 바로 그 작은 변화들 때문이었다.
다크 로스트는 때로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맛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진한 바디와 쓴맛을 얻는 대신, 원두가 원래 가지고 있던 단맛이나 산미는 전부 태워버린 것 같은 커피.
그런데 West Pole은 진하고 스모키하면서도 그 안에 초콜릿의 고소함, 약한 산미, 그리고 끝에 남는 향신료 같은 결을 남겨두고 있었다.
스모키한 향도 딱 좋았다.
조금의 연기 같은 느낌은 분명 있는데, 그 향이 탄 맛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오래된 가죽 소파나 벽난로 옆에 잠깐 앉아 있을 때 옷에 아주 옅게 배는 나무 향처럼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고 난 뒤에도 쓴맛만 길게 남는 것이 아니라, 깊고 크리미한 질감이 천천히 사라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셨을 때는 West Pole이 조금 다른 표정을 보여줬다.
얼음이 들어가면서 무게감은 자연스럽게 가벼워졌지만, 커피의 중심은 생각보다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다크 초콜릿 같은 고소함은 조금 더 깔끔해지고, 에스프레소에서는 뒤에 머물던 산미가 아주 작게 얼굴을 내민다.
늦은 오후,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졌을 때 천천히 마시기 좋았다.
라떼로 마신 날에는 이 원두가 왜 부드럽다고 느껴졌는지 조금 더 분명해졌다.
우유가 들어가자 스모키한 인상은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초콜릿과 몰라세스 같은 단맛은 더 포근하게 이어졌다.
그렇다고 단순히 달고 묵직한 라떼가 되지는 않았다.
끝에 남아 있던 약한 스파이스와 다크 로스트의 깊이 덕분에,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커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남아 있었다.
드립은 모든 원두에 꼭 시도해봐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원두는 물이 천천히 지나가며 열어주는 향이 더 아름답고, 어떤 원두는 짧은 에스프레소 안에서 자기 이야기를 더 잘한다.
West Pole은 내게 후자였다.
에스프레소로 마시고, 조금 느슨한 오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시고, 가끔은 라떼로 더 부드럽게 마시는 쪽이 이 원두와 가장 잘 맞았다.
좋은 커피가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
어떤 커피는 첫 모금부터 놀라움을 주고, 어떤 커피는 낯선 향으로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West Pole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남았다.
서늘한 날, 조용한 오후, 굳이 말로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커피.
진하고, 초콜릿 같고, 아주 조금 스모키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칠지 않다.
Cuvee Coffee West Pole은 마시는 동안보다 다 마신 뒤에 더 따뜻하게 기억나는 다크 로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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