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스키를 좋아하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비싸게 산 병은 아까워서 좀처럼 줄지 않고, 특별한 날에 마시겠다며 술장 한쪽에 모셔두게 된다.
반면 처음부터 대단한 기대 없이 산 병은 아무 생각 없이 한 잔씩 따르다 어느 날 문득 바닥을 보인다.
사진 속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도 그런 병이었다.
그것도 750mL가 아니라 1.75L짜리 커다란 병이다.
처음부터 소장할 생각으로 산 술은 아니었고, 한 잔을 마실 때마다 복잡한 향을 찾아가며 천천히 음미했던 술도 아니다.
그런데 결국 완전히 비었다.
어쩌면 이 위스키에 대한 가장 솔직한 평가는 긴 테이스팅 노트보다, 바닥까지 깨끗하게 비워진 병 하나가 이미 대신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가성비
Kirkland Signature라는 이름이 붙은 술들에는 공통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것이 있다.
화려한 브랜드 스토리나 멋진 증류소 사진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가격이다.
Costco에서 판매되는 Kirkland spirits 가운데는 종종 “이 가격에 이 정도면 반칙 아닌가” 싶은 병들이 있는데,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 누구도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가성비 갑.
엄청난 개성을 가진 위스키도 아니고, 첫 모금부터 감탄사를 부르게 만드는 술도 아니다.
하지만 큰 병을 부담 없이 집어 들 수 있고, 잔에 넉넉히 따라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위스키에서 가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속물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데일리로 마시는 술에서 가격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맛있는 술이라도 따를 때마다 병에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손이 덜 간다.
반대로 부담 없이 따를 수 있는 병은 별다른 이유가 없는 저녁에도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는 분명 후자였다.
Costco version of Crown Royal
이 술을 두고 종종 “Costco version of Crown Royal”이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저렴한 Canadian Whisky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Crown Royal과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를 실제로 연달아 마셔본 적이 있었다.
두 잔을 번갈아 마시면서 차이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솔직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큰 간격은 느끼지 못했다.
물론 완전히 같은 술이라는 뜻은 아니다.
집중해서 비교하면 질감이나 단맛의 방향, 끝에 남는 느낌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쪽은 잘 알려진 왕관 모양 병의 브랜드였고, 다른 한쪽은 Costco 선반에 놓여 있던 거대한 Kirkland 병이었다.
그 이름값과 가격의 차이만큼 잔 안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 혀가 잘못한 건가?
지금 다시 마셔보면 조금 다른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당시의 기억만 놓고 보면, “Costco version of Crown Royal”이라는 표현이 아주 엉뚱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비교를 알고 난 뒤에는 이 술의 가성비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버번과 스카치 사이의 굵은 선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는 마실 때마다 어딘가 버번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내 버번 취향의 문을 열어주었던 Legent처럼 본격적인 버번의 성격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술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버번을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결이 있었다.
옥수수와 rye를 연상시키는 익숙한 결이 있고, 여러 원액을 섞어 모서리를 부드럽게 다듬어놓은 듯한 편안함이 있다.
버번에서 느껴지는 달큰하고 굵직한 인상은 남아 있지만, 그 힘이 정면으로 밀고 들어오기보다는 조금 더 둥글게 정리되어 있다.
예전에 나는 이 술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버번보다는 조금 더 여자여자한 느낌을 주는데, 그렇다고 스카치라고 하기에는 4B 연필로 그은 것처럼 너무 굵직하다고.
지금 다시 읽으면 꽤 거칠고 주관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이 술을 설명하는 데 잘 맞는 것 같다.
버번처럼 힘이 있지만 버번만큼 거칠지는 않다.
조금 더 부드럽고 편하게 넘어가지만, 섬세한 선으로 그려지는 스카치와는 또 다르다.
샤프펜슬로 얇고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4B 연필을 손에 쥐고 한 번에 굵게 선을 그어놓은 느낌이다.
복잡한 부분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술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술에 가깝다.
그리고 그 단순하고 굵은 성격이 오히려 다른 재료와 섞였을 때 장점이 되었다.
결국 대부분 하이볼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를 neat로 오래 마시고 싶었던 적은 많지 않았다.
마실 수 없는 술은 아니었다.
알코올 자극이 지나치게 강한 것도 아니었고, 목넘김도 비교적 편했다.
하지만 잔에 따라놓고 오랫동안 향의 변화를 기다리거나, 한 모금씩 아껴 마시기에는 어딘가 조금 심심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시기 좋았던 Glengoyne 10 Year와는 정반대에 가까웠다.
Glengoyne 10 Year가 조용히 잔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술이었다면,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는 얼음과 탄산수를 꺼내게 만드는 술이었다.
반면 얼음과 탄산수가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버번과 비슷한 굵직한 중심이 있어 탄산에 완전히 묻히지 않았고, 지나치게 강하거나 무겁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가격이 좋았다.
비싼 싱글몰트를 하이볼에 넣을 때처럼 잠시 멈칫할 필요가 없었다.
얼음을 넉넉히 넣고, 원하는 만큼 따르고, 탄산수의 양을 그날 기분에 맞춰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집에서 만든 웬만한 하이볼은 거의 이 녀석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여기에 레몬이나 라임을 더하는 평범한 방식에서 조금 벗어나, 재료와 비율에 약간씩 변화를 주기도 했다.
정확한 레시피를 재현하기보다는 그날 마시는 사람에 맞게 단맛과 탄산을 조절했고, 술의 존재감이 너무 앞으로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는 그런 변화를 꽤 잘 받아주었다.
주인공처럼 모든 맛을 장악하기보다, 하이볼 안에서 필요한 만큼만 자기 역할을 했다.
JQ표 하이볼을 찾는 사람들
이 술에 관한 기억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정작 위스키 자체보다, 이 위스키로 만든 하이볼을 마셨던 사람들이다.
가끔 함께 캠핑을 가고, 주말이면 자연스럽게 어울리곤 하던 동생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연애부터 결혼까지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둘이 술을 마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만큼, 흔히 말하는 ‘알쓰’에 가까웠다.
위스키를 잔에 따라주면 한두 모금 마신 뒤 자연스럽게 잔을 내려놓는 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로 조금 변화를 준 하이볼을 만들어주었다.
술의 느낌은 남기되 부담스럽지 않게 만들고, 단맛과 탄산의 균형도 조금 더 부드럽게 맞췄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벼운 한 잔이었지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괜찮은 입문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뒤부터 동생네 부부는 가끔 주말이 되면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JQ표 하이볼이 땡긴다.”
별것 아닌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꽤 기분 좋은 칭찬이다.
비싼 위스키의 숙성 연수나 캐스크 이야기를 열심히 설명했을 때보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준 한 잔을 누군가가 다시 떠올려주는 일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들이 생각한 것이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였는지, 내가 더한 작은 변화였는지, 아니면 함께 앉아 마셨던 주말의 분위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섞여 있었을 것이다.
위스키도 결국은 혼자 잔 안에 있을 때보다, 사람과 시간 사이에 놓였을 때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커다란 빈 병이 남긴 대답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를 최고의 Canadian Whisky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neat로 마셨을 때 오래 생각하게 되는 술도 아니고, 섬세한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병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 술장 가장 좋은 자리에 세워둘 만한 병도 아니다.
하지만 이 술에는 다른 장점이 있었다.
부담 없이 따를 수 있었고, 여러 방식으로 편하게 마실 수 있었으며, 하이볼 안에서도 충분히 자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한 잔을 다시 찾는 사람들이 생겼다.
무엇보다 1.75L의 큰 병이 결국 바닥을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술은 아무리 싸도 끝까지 비워지지 않는다.
처음 몇 잔의 호기심이 지나가고 나면 술장 한쪽에서 먼지만 쌓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병은 어느새 비어 있었다.
대단해서 비운 술이라기보다는 편해서 비운 술이었고,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둔 술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주말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들어준 술이었다.
다시 한 병을 산다면 이번에도 대부분 하이볼이 될 것 같다.
neat로 마시며 깊이 생각할 일은 많지 않겠지만, 얼음을 채운 잔과 탄산수를 꺼낼 때면 자연스럽게 손이 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동생 부부가 JQ표 하이볼을 찾는다면, 별 고민 없이 이 커다란 병을 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위스키는 첫 잔의 감탄으로 기억되고, 어떤 위스키는 마지막 한 방울이 사라진 뒤에야 얼마나 자주 마셨는지를 깨닫게 한다.
Kirkland Signature Blended Canadian Whisky는 내게 후자였다.
화려하게 기억되는 술은 아니었지만, 결국 가장 자주 하이볼이 되었고, 가장 편하게 비워진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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