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포션 리뷰: 한의사 선생님이 이름을 물어보셔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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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침을 맞으면서 한의사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 얘기로 흘러갔다.
목과 어깨에 침을 꽂은 채 엎드려 있으니 딱히 할 것도 없어서, 요즘 뭘 마시냐는 질문에 이것저것 대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막걸리 쪽으로 넘어갔다.

선생님이 알고 계신 막걸리는 미국 마트나 한인 슈퍼에서 흔히 보이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몇몇 병들이 전부였다.
딱히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접근성이 좋은 만큼 개인적으로는 좀 무난하고 평범하게 느껴지는 쪽이라는 정도의 인상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평소에 즐겨 마시는 막걸리 몇 병을 소개해드렸고,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걸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이 녀석이라며 이름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침을 다 맞고 나가시면서 “그 이름이 뭐였죠?” 하고 다시 물으셨고, 결국 기억이 안 난다며 블로그에 올려놓으면 참고하겠다고 하셔서,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가며 글을 쓰게 됐다.

그저 그런 병들만 알고 계셨던 이유

선생님이 말씀하신 병들을 들어보니, 미국 어디서나 흔하게 보이는 대형 유통 브랜드들이었다.
딱히 흠잡을 데 있는 술들은 아니고, 미국까지 안정적으로 유통망을 뚫고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막걸리는 병에 담긴 뒤에도 발효가 계속 진행되는 살아있는 술이라 원래 유통기한이 짧고, 그 상태로 태평양을 건너 매장 진열대까지 버티려면 별도의 냉장 유통망이 필요하다.

미국 매장에서 자주 보이는 막걸리는 비교적 안정적인 유통망을 갖춘 몇몇 대형 브랜드에 집중되는 편이다.
반면 개성이 뚜렷한 소규모 양조장 제품은 짧은 유통기한과 냉장 보관, 수입·유통 과정의 부담 때문에 미국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 매대만 보면 막걸리의 맛이 생각보다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개인적인 입맛 기준으로는, 그 몇 병이 미국 막걸리 시장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좀 아쉬웠다.
이런 개성 있는 양조장 병들은 미국 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 없어서, 한국에 갈 기회가 생기면 물 만난 물고기처럼 평소 궁금했던 전통주를 찾아보곤 한다.
그래서 선생님께도 한국에 가실 일이 생기면 기회 될 때 한 번 찾아 드셔보시라고 말씀드렸다.

그중에서도 자꾸 손이 가던 녀석

막걸리도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새콤한 쪽부터 스파클링에 가까운 쪽, 단맛이 진한 쪽까지 언젠가 하나씩 소개해드리고 싶은 카테고리가 몇 가지 있다.
그날은 침 맞는 짧은 시간 안에 나눈 얘기라, 그중에서도 딱 두 가지, 하드포션과 경탁주만 이름을 말씀드렸다.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할 녀석은 그중에서도 이 하드포션이다.

다른 병들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손이 가는 정도였다면, 이 녀석은 냉장고에 있으면 이유 없이 자꾸 꺼내게 되는 쪽이었다.
14.3%라는 도수만 보면 부담스러울 법한데, 막상 잔에 따르면 걸쭉한 질감이 그릭 요거트를 마시는 듯한 식감으로 먼저 다가오고, 거기에 향긋하고 상큼한 기운과 너무 세지 않은 은은한 새콤함이 붙어서 한 모금 한 모금이 계속 편하게 넘어간다.
마실 때마다 그 편안함이 쌓여서 어느새 최애가 되어 있었던 경우라, 막상 이름을 설명하려니 오히려 말이 잘 안 나왔던 것도 이해가 간다.

하드포션이라는 장난스러운 이름

병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웃었던 부분은 라벨이었다.
“ESTABLISHED GIMPO KOREA PREMIUM MAKGEOLLI”라는 점잖은 영문 표기 바로 아래에, 손글씨로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HARD POTION”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박혀 있다.
포션이라는 단어가 주는 판타지 게임 아이템 같은 느낌과, 그 위에 붙은 “UNDILUTED(무가수)”라는 빨간 글씨가 묘하게 잘 어울려서, 마치 정말 무슨 효력이 있는 물약을 손에 든 기분이 든다.
375ml라는 아담한 사이즈도 한몫하는데, 큰 병보다 훨씬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라 부담 없이 열어보게 되는 병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375mL라는 용량이 워낙 작아서, 한 병을 비우고 나면 늘 조금 아쉽게 끝난다는 점이다.

진지한 전통주 브랜딩과 장난스러운 네이밍 사이의 그 간극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이 병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무가수가 만드는 밀도

라벨에 큼직하게 박힌 “UNDILUTED”라는 단어처럼, 이 녀석은 물을 더해 가볍게 희석하지 않은 막걸리다.
일반 막걸리 중에는 제조 과정에서 물을 더해 도수와 질감을 조절하는 제품이 많다.
반면 이 병은 라벨에 적힌 무가수라는 표현처럼, 물을 더해 가볍게 희석하지 않은 방식에서 오는 밀도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잔에 따랐을 때부터 묵직하고 걸쭉한 질감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입 안에서도 훨씬 밀도 있게 느껴진다.
흔들어서 따라도 뽀얀 앙금이 술과 쉽게 분리되지 않고 끝까지 뭉근하게 섞여 있는 편이라,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이게 쌀로 빚은 술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난다.

김포 추청미가 남기는 단맛

병 라벨에는 김포 추청미로 빚었다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실제로 마셔보면 인공적인 단맛보다는 쌀 자체에서 우러나온 듯한 은은하고 구수한 단맛이 먼저 느껴진다.
흔한 막걸리에서 나는 새콤함이 앞서 튀어나오는 대신, 단맛과 곡물 향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뒤로 산미가 살짝 따라오는 순서라 훨씬 편안하게 넘어간다.

시큼한 막걸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에게 권하기에도 좋은 프로필인데, 그렇다고 마냥 달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물리지 않는다.

14.3%, 막걸리치고는 묵직한 무게

도수를 보면 14.3%로, 보통 6~8% 사이인 시중 막걸리들에 비하면 거의 두 배에 가깝다.
물을 더해 희석하지 않은 방식에서 나온 도수와 질감이기도 한데, 실제로 마실 때는 그 숫자만큼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워낙 질감이 묵직하고 단맛이 앞서다 보니 도수는 뒤늦게, 조용히 올라오는 편이라 한두 잔 마시고 나서야 “어, 생각보다 독하네” 하고 깨닫게 되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가볍게 벌컥벌컥 마시기보다는, 작은 잔에 조금씩 따라 천천히 즐기는 쪽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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